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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비평] 드라마 속 '왕자님'전성시대의 그림자

 최근 들어 드라마 세상에서 왕족들이 약진하고 있다. 올 초 가장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는 <해를 품은 달>이었고, 왕 역할을 맡은 김수현이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더킹 투하츠>가 방영되고 있는데 여기선 이승기가 왕의 동생으로 나온다. 또 요즘 인터넷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옥탑방 왕세자>에선 박유천이 왕세자로 나오고 있다.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주인공 캐릭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왕족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작년 초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시크릿 가든>이었는데, 현빈은 이 작품에서 재벌3세 역할을 맡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작년엔 <시크릿 가든> 말고도 재벌 드라마 천지였다. 예컨대 2011년 7월 기준으로 일일드라마엔 퀸스그룹의 황태자가 등장하고, 월화드라마엔 몬도그룹 후계자와 호텔이나 패션회사의 사장들, 수목드라마엔 수조 원을 굴리는 자산운용사 2세, 주말엔 우경그룹 2세, 진성그룹 2세, 은성그룹과 수조 원을 가진 사채왕 2세 등이 나왔고 그 외에도 준재벌 수준의 집안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등장했다.

 이런 일들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부터였다. 당시 차인표가 신세대형 귀족남 캐릭터의 전형으로 제시됐다. 그후 '실장님'으로 불리는 재벌남들이 로맨스 드라마 남자주인공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런 경향은 2000년대 이후 강화되어 재벌2, 3세가 이상적인 남자 캐릭터로 발전해갔다.

 그랬던 것이 최근 2~3년 사이에 완전히 극단화되어 재벌 2, 3세가 완벽한 남성상으로 확연히 굳어졌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은 똑똑하고 지적이며, 세련된 취향의 소유자이고, 아무 가진 것 없는 여자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순정도 있고, 평생 동안 근무한 중역들보다 전문적인 경영능력도 더 뛰어나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용서하는 인간미까지 갖춘 캐릭터였다. 얼짱에 길쭉길쭉한 몸매는 기본이다.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약간 까칠한 성격, 혹은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상처 정도인데 여주인공이 그것을 고쳐준다. <웃어라 동해야>에선 그런 까칠함이나 상처마저도 없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재벌3세가 등장했다. <꽃보다 남자>의 재벌2세는 봉건시대에나 있던 하인들의 시중을 받기도 했다.

 요즘 나오는 왕족 캐릭터들은 이런 재벌 실장님 캐릭터의 결정판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물질적인 완벽함에 봉건적 신분까지 갖춘 '실장님 2.0'인 것이다. 이제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정말로 신분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드라마 속 캐릭터가 화려해지는 사이에 우리 사회가 겪은 것은 민생파탄이었다. 실장님 캐릭터의 전성시대는 곧 88만원 세대의 시대이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 불안과 빈곤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을 때, 젊은 사람들이 즐기는 드라마는 가장 화려하게 변화해간 것이다.

 이것은 빈곤과 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더 황금을 동경하게 됐기 때문이다. 2000년대는 '부자 되세요'의 시대, 황금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돈을 열망하기 때문에 재벌남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뭐든지 다 가지고 있을 것 같고, 풍요를 약속해줄 것 같은 남성과의 로맨스판타지에 십수 년째 시청자들이 빠져들고 있다.

 그럴수록 정작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커져갈 수밖에 없다. TV를 통해 화려한 삶, 화려한 로맨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현실의 남루한 로맨스, 남루한 결혼에 더욱 '쪽팔림'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결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즉 드라마의 달콤한 로맨스판타지를 즐기는 사이에 진짜 로맨스를 향유할 능력은 거세되는 것이다.

 특히 미성년자들은 연예인이나 드라마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드라마 속에서 신분서열관계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보며 승자독식경쟁구조라든가 '찌질이'에 대한 무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도 커져갈 것이다. 왕자님 전성시대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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