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모호함 속에서 번영해 온 국가로, 올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SC)를 개최하기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유로비전은 진지한 동시에 풍자적인 이 쇼를 통해 1956년부터 정치와 무관한 민망한 축제를 이어왔고, 멜로디와 유머, 반짝이 의상을 통해 유럽의 통합을 독려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이 콘테스트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도 이상하게도 응집된 대륙의 거울 이미지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올해 ESC의 슬로건인 ‘음악으로 하나되다’는 희망 섞인 바람처럼 느껴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유럽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분열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안보와 무역에 대한 오랜 전제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같은 국가들이 트럼피즘에 기울고 있는 가운데 브뤼셀은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대부분의 국민들은 미국 대통령을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올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스위스에서 열렸다. 출처: ESC 페이스북
유럽연합에 속하지 않은 스위스는 특히 혼란스러운 현실 직면의 순간을 맞고 있다. 베른에서는 정치인들이 이 변화하는 지형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논의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EU보다 훨씬 높은 31%의 징벌적 관세율을 발표하자, 스위스 전역에서는 분명한 놀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트럼프가 엑스에 “가장 먼저 협상하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 쓴 뒤, 베른과 제네바, 워싱턴에서는 일방적인 외교적 구애가 짧고 강하게 오갔다. 이 과정은 스위스 대통령 카린 켈러-주터(Karin Keller-Sutter)와 외무부 장관 기 파르멜랭(Guy Parmelin)이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및 무역대표 제이미슨 그리어(Jamieson Greer)와의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초콜릿 상자를 포장하는 모습으로 절정에 달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스위스 관리들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발표했다. 스위스는 “우선순위” 무역 파트너라는 내부 그룹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켈러-주터와 파르멜랭은 정부 내 보수 다수파에 속하며, 외교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가 EU의 보복관세 전략을 채택하길 원하는 의회의 비판적 목소리를 완강히 무시하고 있다. 물론, 이웃 국가들과 힘을 합치는 것은 스위스의 전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수십 년 동안 스위스는 자국의 글로벌 은행망, 보험사, 자산관리 회사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왔고, 강력한 이웃 국가들과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지 않음으로써 브뤼셀의 제재를 받는 국가들과의 거래를 통해 이중으로 이익을 누려왔다.
그 외에도, 스위스는 로슈(Roche)와 노바티스(Novartis) 같은 시장 선도 기업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제약 산업을 구축해왔다. 제약 기업들은 미국과의 무역 적자의 주요 원인이지만, 이들의 제품은 처음부터 예고된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 기업은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그러나 제약사 최고경영자들의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최근 미국 내 의약품 가격 인하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자들은 마치 트럼프의 손가락 끝을 따라 경기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쫓기듯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유럽 전역의 경영자들이 무역 전쟁에 대한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반면, 유럽 시민들은 대서양 동맹의 침식과 실제 전쟁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유럽인의 다수는 러시아를 적대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더 이상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보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나토(NATO)에 공식적으로 가입하지 않고도 그 혜택을 누려온 스위스는, 기껏해야 국제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군사력 면에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중립은 더 이상 과거처럼 피난처가 아니다. 스위스는 대륙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점 이웃 국가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에 가입했고, 발트해 국가들과 폴란드는 군사비 지출을 급격히 늘렸다. 나토 가입은 대다수 스위스인에게 여전히 고려 대상이 아니며, 특히 지금처럼 동맹 내부의 분열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전처럼 계속 행동할 수는 없다.
스위스 국민 다수는 국방 예산을 늘리길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미국산 F-35 전투기 구매는 스위스 전역에서 어색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내륙 산악 국가인 스위스가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주목할 점은 스위스가 유럽의 독일 등 국가에 주로 무기를 수출하는 상당한 규모의 무기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스위스 법에 따르면, 무력 충돌이 발생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스위스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으며, 스위스산 무기를 구매한 국가들이 이를 우크라이나에 이전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스위스는 도덕적 회피라는 점점 더 커지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스위스 정치인들은 자국의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특정 상황에서는 교전 당사국에 무기 이전을 허용할 수 있는 법적 가능성을 두고 죄책감과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제안은 실패했다. 정치인들이 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고심하는 사이, 스위스 군대는 일련의 스캔들에 휘말리며, 이 나라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돈을 버는 데 훨씬 능숙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과의 차이점에도 스위스 내부의 논쟁은 이웃 국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방비를 늘릴 것인가 — 그렇다. 하지만 어떻게? 무역 경로를 확보할 것인가 — 그렇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그러하듯이, 스위스에서도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공포와 불안정성의 전반적인 확산 속에서 득을 보고 있다. 이는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프랑스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 이탈리아의 이탈리아형제당(Fratelli d’Italia) 등과 마찬가지다.
“힘의 정치 귀환은, 특히 스위스처럼 작은 나라에게 큰 도전이다”라고 연방의회 하원인 국민의회 외교위원회 및 안보정책위원회 소속 사회민주당 의원 파비안 몰리나(Fabian Molina)는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스위스가 유럽과 보다 밀접한 계약적 관계를 구축하고, 규칙 기반 질서를 수호하려는 EU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때다.” 몰리나는 스위스가 기존의 중립성과 이익 극대화 전략을 따르기보다는, 평화 구축과 국제법 강화라는 오래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것이 워싱턴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스위스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이상주의적 목소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다. 이는 국방 예산 증가뿐 아니라, 냉전 시기 배포되었던 방사능 재난 대비 지침의 개정판인 ‘위기와 전쟁 속 행동 요령: 국민을 위한 안내서’를 다시 배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안내서는 핵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일주일 치의 물, 쌀, 파스타, 배터리 작동 라디오를 비축하라고 국민에게 지시한다. 이 지침은 유럽 대륙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을 때 스위스가 취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응 방식을 전제로 한다. 1960년대에 조성된 광범위한 벙커 체계에 숨는 것이다. 이 벙커 체계는 법적으로 모든 주민에게 한 자리를 보장하고 있다.
[출처] United By Dissonanc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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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콜리(Alice Kohli)는 스위스 취리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언론인이자 물리학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