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본주의는 지금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소득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되었고, 그 결과 체제는 정체 상태에 빠졌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소득의 더 큰 비율을 소비에 사용한다. 따라서 부의 편중이 커질수록 총소득이 늘어도 소비는 그만큼 늘지 않는다. 그 결과 생산능력의 확대에 비해 수요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성장 둔화와 경기 침체, 그리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세계 경제는 2008년 미국의 주택시장 거품이 붕괴한 이후부터 바로 이 상황에 갇혀 있다. 그 이전까지 거품은 일시적으로 침체의 폭발을 억눌러왔으나, 거품이 터지자 침체는 전 세계로 퍼졌다.
출처: Unsplash, Erik Mclean
전후 시기 자본주의가 이런 침체를 극복해 왔던 표준적 방식은 정부 지출 확대였다. 정부는 재정적자 또는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지출을 늘림으로써 경제를 부양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하에서는 이런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패권을 쥔 국제 금융자본은 재정적자 확대와 부자 증세 모두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현재 맞닥뜨린 막다른 길(cul-de-sac)은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 신자유주의가 체제를 침체에 빠뜨리고 실업을 폭증시켰지만, 그 틀 안에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막다른 길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자유로운 자본 이동, 특히 국경 간 금융자본 이동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막다른 길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세기 대부분을 차지한 빅토리아·에드워드 시기의 장기 호황은 전(前)자본주의적 식민지 및 반(半)식민지 세계로부터의 자원 약탈과 침투 위에 세워졌다. 이런 착취는 산업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대륙 유럽으로, 다시 캐나다·미국·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 등 유럽 이주 지역으로 확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식민지 수출이 고갈되고, 인도와 중국 같은 시장이 위축되면서 그 호황은 끝났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찾아온 대공황은 바로 이런 외부 자극의 소진을 드러낸 현상이었다.
전후 자본주의는 정부 지출이라는 새로운 자극원을 발견하며 또 다른 장기 호황을 맞이했다.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린 시기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봉쇄되자 체제는 다시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 그 깊이는 1930년대 대공황만큼 심각하지 않지만, 구조적으로는 유사한 국면이다. 아직 그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레닌이 말했듯 “자본주의에 불가능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위기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현재 이 위기의 두 가지 뚜렷한 표현이 있다. 첫 번째는 세계적 규모로 부상하는 네오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두 개의 기둥 위에 선다. 하나는 극단적 폭력과 탄압, 다른 하나는 특정 종교나 민족 집단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는 것이다. 파시즘은 사회 내부의 기존 분열을 이용하지만, 그것이 ‘전근대적 잔재’라는 통념은 틀렸다. 파시즘은 후기 자본주의라는 현대적 조건에서 발생한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현상이다. 다수 집단이 소수 집단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되는 과정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점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치밀하게 선동된 결과다. 대기업들은 막대한 자금과 언론을 동원해 사회 주변부의 극우 집단을 정치의 중심 무대로 끌어올리고, 그들의 증오를 확산시킨다. 목적은 단 하나다. 위기 속에서 독점자본의 지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피지배계급을 분열시켜 저항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대규모 실업은 이런 파시스트 집단이 독점자본의 자금으로 손쉽게 신병을 모집할 수 있게 만든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벌어진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신(新)파시스트 세력은 과거처럼 이 막다른 길을 벗어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네오(neo)’라는 접두어가 붙는다. 과거의 파시즘은 재정적자 확대를 통한 군비 지출로 대공황을 돌파했다. 즉, 당시의 파시즘은 국가가 금융자본의 반대를 뚫고 대규모 재정지출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금융자본이 주로 ‘국가적’ 자본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의 금융자본은 철저히 ‘국제적’이다. 따라서 어떤 신파시스트 정권도 재정적자 확대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대를 꺾을 수 없다. 이 점은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과거보다 훨씬 약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네오파시즘이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것이 여전히 선거라는 제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완전히 폐지되지 않는 한, 네오파시스트 정권은 선거로 축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물러난 뒤 들어서는 반파시스트 세력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데 실패한다면, 네오파시스트들은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표현은 트럼프 행정부가 단행한 대규모 관세 부과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로부터의 부분적 후퇴를 의미하지만, 근본적인 탈피는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의 핵심, 즉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자본 이동(특히 금융자본의 이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명백한 신호였다. 기존의 ‘자유무역-자유자본이동’ 체제 안에서는 미국 내 고용을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호였다. 관세 부과는 미국 내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타국의 일자리를 줄이는 시도였다. 즉, 미국의 실업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근린궁핍화 정책(beggar-thy-neighbour policy)이었다. 이런 ‘이웃 거지 만들기’식 정책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도 경쟁적 환율절하의 형태로 시도되었지만, 그때도 실패했다.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다른 나라가 이처럼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면, 곧바로 ‘투자자의 신뢰 상실’(즉, 자본 도피)로 이어져 자국 통화가 폭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달러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부분적으로 후퇴하면서도 유로 대비 단 4.57%의 가치 하락에 그쳤다(2025년 9월 28일까지 1년간 기준). 미국 내 고용은 트럼프 행정부가 기대하는 만큼 증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보복 조치가 없더라도,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이 보호무역의 효과를 상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고율 관세는 단기적으로 전 세계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이 두 현상 ― 네오파시즘의 부상과 미국의 관세정책 ― 은 모두 극단적 조치다. 네오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자유와 민주주의의 체제’라 칭해온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또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국가가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을, 그것도 제3세계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까지 상대로 펼친다는 것은 최근 역사에서 유례없는 절망과 무력감을 드러낸다. 이런 극단적 움직임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출처] Two Expressions of Capitalism’s Cul-De-Sac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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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