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경원에서: 조선공산당의 분열

춘경원

일제 강점기 초반에 시작된 요릿집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불릴만하였다. 1880년대 일본의 요정 문화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시작된 요릿집에선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돈만 있으면 임금이 잡수셨다는 음식을 먹고’ 기생의 연주와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다이러한 현상은 일제 강점기 내내 그리고 60, 70년대 요정으로 이어져 왔다요릿집은 음식점에 머문것이 아니라 연회와 공연그리고 기생이 동원되는 접대의 장소이기도 하였다동시에 회의와 모의담판이 오가던 곳이었다당대의 유명한 고급 요릿집에 명월관국일관식도원 등이 있었고 다수가 회합하기에 적당한 장소이기도 하였다하지만 고급 요릿집의 가격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힘든 수준이었다그 보기로 1934년 경성관광협회의 안내서를 보면 요릿집의 가격은 한 상 6인분을 기준으로 6원 9원 12원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고 적혀 있다당시 공장노동자들의 임금이 일 58월 20원이 안 되었다.

1927년 12월 21일 경성의 무교정 17번지 (오늘날의 무교동)에 위치한 조선요릿집 춘경원에 16명의 사내가 모였다모임의 명목은 권태석의 생일축하연이었지만사실은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를 목적으로 회합한 것이다이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1년 전인 1926년 12월 2차 당대회 통해 선출된 중앙집행위원과 당 기구를 통해 선출된 각도의 대의원들이었다이들은 당시 당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당내 비밀그룹인 레닌주의 동맹이 전횡을 일삼고 있으며영남친목회호남동우회 등에 가입하여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원칙을 파괴하고 나아가 계급 간 타협을 목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가장 커다란 문제는 당내 당의 존재였다레닌주의 동맹흔히 ML당으로 알려진 그룹의 존재였다철의 규율이 유지되어야 할 비합법 사회주의 정당의 윤리로 용서될 수 없는 행위였다.

조선공산당의 당규는 당대회를 1년에 1회 개최하도록 명시되었다그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당대회, 1926년 12월 당대회를 치렀다따라서 3차 당대회는 1927년 연내에 열려야 했다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는 1927년 7월에 코민테른에 보고자로 파견한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로부터 코민테른의 결정 사항을 보고받았다보고 내용은 코민테른은 2차 당대회를 승인하였다는 것과 차기 당대회와 관련한 지침이 들어있었다당대회는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의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대표가 참석해야 한다는 점 등이었다이에 따라서 조선공산당은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책임자로는 이영을 지명하였다이영은 1913년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졸업하고 1917년까지 만주 지역 독립운동 계열의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 귀국하여 고향인 북청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만기출소 직후이던 1920년경부터 공산주의 소그룹을 조직하였고 1923년 2월에 결성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던 고려공산동맹의 주요 지도자였다그 후 고려공산동맹을 해산하고 1927년 4월 조공에 입당한 명망이 있는 고참사회주의자였다당대회 준비 기구를 조직함과 동시에 조선공산당은 당대회를 위하여 산하 도당과 야체이카를 통해서 당대회에 참가하는 대의원을 선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이영

이렇듯 조선공산당이 공식 기구를 통해 당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 심각한 문제가 당 내외에서 발생하였다그 문제의 방아쇠가 된 것은 1927년 9월 4일 창립식을 치른 영남친목회 사건이었다.

영남친목회는 영남 출신자들의 친목 모임이었다이 친목회는 창립 첫날부터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였다영남 출신자 중 반대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계급도 주의(主義)도 이해(利害)도 다른 이들이 친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당시 결성된 신간회를 염두에 둔민족전선을 위해서는 차이를 극복할 수 있지만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강화하는 영남친목회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반대의 여론은 더욱 커져갔다영남친목회에만 한정하지 않고 호남동우회와 함경평안황해지역의 서북 5도 지역 출신자들의 모임은 오성구락부등까지 포함하여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모든 모임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사가 사회운동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다이러한 여론에 힘을 더욱 실은 것은 당시 대표적 대중운동 조직이었던 청년총동맹노동총동맹농민총동맹과 민족단일당 노선에 입각하여 창립한 신간회에서마저도 지역주의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했다는 것이다운동진영과 사회일반의 여론은 거세었다.

지역주의 반대운동은 단체를 넘어 참여자들을 찾아내어 그 책임을 묻는 데까지 나갔다그 결과 김준연은 호남동우회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안광천은 영남친목회의 취지서를 집필한 사실이 밝혀졌다둘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운동자바로 사회주의자였다사회운동자로서 이러한 처신은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이러한 대중적으로 강력했던 지방주의 반대운동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가 있다호남동우회는 자진 해산을 선택하였고 영남친목회와 오성구락부는 활력을 잃고 해산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밖에서 지방주의 반대운동이 대중적으로 벌어지는 동안 당내에서는 가담 행위자들에 대한 엄정한 징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들의 비판은 매서웠다.

안광천 김준연등은 ......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획득에 힘쓰지 않고지방적 헤게모니 획득에 몰두했다국가 독립의 기치하에서 군중적 혁명 투쟁을 지도하지 않고 친일파 자치파와 함께 지방열 단체에 협동사업을 했다농민의 토지 획득을 위해 투쟁하지 않고 자기 고향의 대지주 층과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임경석, 『1927년 영남친목회반대 운동 연구』 인문과학 제68집 284쪽 인용)

비판의 수위가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제명을 요구한 것이었다당의 책임비서인 안광천과 그 뒤를 이었던 김준연 둘을 제명하라는 것이었다총 7인으로 구성된 당 중앙집행위원회중 권태석 김남수를 제외한 5인으로 이루어진 다수파의 결정은 폭력적이었다안광천의 책임비서직은 면직되었지만김준연이 그 뒤를 이어받았고 거꾸로 문제를 제기한 권태석과 김남수에 대한 중앙집행위원직을 박탈하였다.

한편당 중앙의 내홍 중에도 진행된 대의원 선거는 10월경 마무리가 되었다결과는 국내 조직력이 우세하였고 명분에서 앞섰던 비주류 측의 압도적 승리였다만주와 일본 총국을 포함한 각도별 총 13명의 대의원 지방 대표 선거 결과는 총 13개소의 대의원 중 전북과 황해를 제외한 나머지 11개소에서 당내 비주류 측의 승리였다.

당대회 참여 대의원 선거 이후 당의 주류였던 레닌주의 동맹의 태도는 비주류 측을 더욱 격분시킬 만하였다당대회가 선출 권한을 가진 중앙집행위원의 전원 교체를 단행한 것이었다당규에 비춰봤을 때 중앙집행위의 권한을 넘는 월권이었다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다중앙간부의 명단이 일경에 노출되었다는 궁색한 답변이었다일경의 탄압은 일제강점기 내내 하나의 상수였다중앙간부의 명단이 만약 일경이 알았더라도 그에 맞는 정당한 대응은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정당한 절차를 통하여 대응 방안을 만들어야 했다더구나 교체된 중앙은 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면면은 책임비서 김세연양명김영식최창익최익한이 그들이었다모두 레닌주의 동맹의 구성원이었다레닌주의 동맹이 정우회 선언을 통해 파벌 박멸과 운동선의 통일이라는 주장으로 성립되었던 2차 당대회의 정신이 형해화되는 순간이었다대의원 선거가 끝났으니당대회를 개최하라는 요구에 당 중앙의 주류는 코민테른에서 파견원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대회 연기를 고집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레닌주의 동맹은 당 중앙집행위에 가해진 비판을 정당한 당내 토론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비주류가 보기에는 꼼수와 아집으로 버티는 것으로 보였다결단이 남았을 뿐이었다.

비주류측은 조심스럽게 문제를 풀어나갔다당대회 소집은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권한이었다당대회 소집 측에서는 어렵게 우회 방안을 내었다절차의 문제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방안은 당대회 소집 준비위원회와 전임 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의 공동명의로 당대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그들이 보기에는 현재의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불법적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더구나 선출된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당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었다당칙에 의하면 당원의 1/3이 소집을 요구하면 당대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당규도 있었기에 합법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였다.

당대회가 개최되었던 1927년 12월은 검거 사건이 확대되고 있었다검거 과정에서 당내 ML당의 존재가 신문 지상에 실렸다즉 당내당의 존재라는 기밀이 일경과 언론도 탐지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당의 분열로 당의 기밀이 새어나간 것이리라 추측된다더 이상 당대회를 미룰 수는 없었다.

당대회는 긴급한 정세 속에서 13개의 안건을 처리했다크게 정치노선과 당의 일상 사업 대중조직 노선을 논의하였다이 중 빠질 수 없는 것은 이 당대회의 목적인 당내 분열을 해소하는 방안이었다즉 분파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참여자들은 당 주류 세력을 혹독하게 비판했다당 주류 세력의 핵심 인사들인 18명을 제명 조처한다고 결정하였다. 12월 당대회를 주최한 측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한 셈이었다이 대회는 전형 위원을 뽑아 당의 새로운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했다책임비서는 당대회 소집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영이 선출되었다.

12월 당대회로 당은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당 중앙의 주류 세력이었던 레닌주의 동맹은 1928년 2월에 별도의 당대회를 치르게 된다. 1925년 4월 창당 이후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유지하던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양당 체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조선공산당은 해산 결정이 내려진 1928년 12월까지 당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였고코민테른이 2차 당대회 결정을 내렸던 1927년 4월 결정서에 근거하여 서로가 적법한 계승자의 지위를 두고 다투었다.

[참고자료 및 논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주영하, 『조선요리옥의 탄생안순환과 명월관』 동양학 제50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임경석, 1927년 조선공산당의 분열과 그 성격』 사림 제611927년 영남친목회 반대운동 연구』 인문과학 제68
덧붙이는 말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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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선공산당 코민테른 춘경원 요릿집 이영 영남친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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