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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전쟁에 대한 인도 정부의 입장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겁함을 드러낸다. 인도는 최근 영국이 소집한 약 50개국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미국-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인도는 유엔 총회에서 걸프 지역의 다른 나라들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이란을 비난하는 결의안의 공동 발의국 가운데 하나였는데(비록 이란은 그 나라들에 있는 미국 군사 기지만을 공격했을 뿐이었지만), 이 결의안에서도 역시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을 규탄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또한 인도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암살에 대해 애도를 표명하기까지 며칠이나 걸렸고, 미나브에서 175명의 무고한 여학생들이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에 대해 충격을 표명하기까지는 몇 주나 걸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겁함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그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유엔 총회 결의안에는 무려 135개국이 공동 발의국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을 불쾌하게 만들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소수의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미국-이스라엘 결합이 이란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전쟁을 벌인 것을 명확하게 규탄할 용기를 보인 나라는 거의 없다. 이는 극도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란에 대한 공격은 탈식민화 투쟁의 핵심 개념이었고 탈식민 이후 질서 전체를 떠받쳐 온 국가 주권 개념을 무효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탈식민화의 존재 이유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3세계 국가들의 비겁함은 또한 커다란 의문을 낳는다. 이들 국가는 오랜 세월에 걸친 고된 반식민 투쟁을 통해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국가의 지위를 쟁취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 국가가 같은 제3세계 국가의 주권이 미국 제국주의의 무력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는데도 침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가 우리 세계에 도입한 적어도 두 가지 균열을 인정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하나는 반식민 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던 ‘국가’ 개념의 분열이다. 이 ‘국가’ 개념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에서 발전한 개념과 최소한 세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첫째, 그것은 포괄적이었으며 ‘내부의 적’을 상정하지 않았다. 둘째, 유럽 민족주의와 달리 먼 지역의 자원을 노리는 제국주의적 야망을 배척했다. 셋째, 그것은 국가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신격화하지 않았으며, 국민이 그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의무’라고 보지 않았다.
이 포괄적인 ‘국가’ 개념이 형성된 것은 반식민 투쟁이 다계급적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 이후 구축된 지도주의적 경제 체제는 비록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국가적’ 발전을 달성한다는 명분 아래 무제한적인 자본주의를 억제하려 했다. 이는 그 다계급적 지지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당시 독점 자본가들조차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국가가 제국주의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행사하는 발전 경로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공공 부문의 존재는 이러한 경로의 일부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도주의 체제들이 추구했던 비동맹 정책은 제국주의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발전 추구를 보완했다. 잘 알려진 경제학자 미할 칼레츠키(Michal Kalecki)는 이러한 체제를 ‘중간 체제’라고 부르고, 중간계급이 이러한 체제에서 결정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자본주의(공공 부문)와 비동맹을 이러한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으로 지적한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자본의 세계화와 함께 상황은 변했다. 국내 독점 부르주아지는 세계화된 자본과 통합되었고, 중심부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발전 경로를 추구하던 자신의 의제를 포기했다. 사회의 상층 전문직 및 관료 집단의 일부는 자녀를 중심부로 보내 교육받게 하고 정착시키려는 열망 속에서, 이 세계화된 자본의 후원 아래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합류했다. 토지 부유층 역시 이 새로운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기회를 찾으려 했다. 이 질서는 무제한적이고 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를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농업 노동자, 소생산자, 그리고 하층 봉급 생활자들에 대해 강하게 억압했다. 그 결과 반식민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계급 동맹 내부에 균열이 발생했다.
이제 초점은 더 이상 중심부에 맞서는 ‘국가’가 아니라, 다국적 자본을 포함한 대자본이 GDP 성장률이라는 지표로만 정의된 빠른 ‘발전’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회 집단들에 맞서는 구도로 옮겨갔다. 대자본의 이해관계는 교묘한 방식으로 ‘국가 이익’과 동일시되었고, 모든 계급의 의무는 그것을 촉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국가’라는 용어의 의미에서 이러한 변화는 사실상 반식민 투쟁이 목표로 삼았던 그 ‘국가’의 분열을 의미했다.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국가’를 해방하는 것은 더 이상 최우선 목표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조건 속의 정부에게는 더 이상 바람직한 목표나 의미 있는 목표조차 아니게 되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첫 번째 ‘균열’이다. 이러한 균열 때문에 신자유주의 체제의 정부가 결정을 내릴 때 기준이 되는 것은 특정 입장이 국가 주권을 방어하는가가 아니라, ‘국가’의 새로운 의미와 동일시되는 대자본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촉진하는가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대자본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침략의 피해자인 이란과 함께 서기보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에 편승하는 것이 더 유리하게 보인다. 이는 앞서 언급한 유엔 총회 및 기타 결의안에서 나타난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침묵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한 두 번째 ‘균열’도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전 지도주의 체제에 비해 모든 국가에서 더 높은 GDP 성장률을 가져올 수 있는 수출 주도 성장을 도입한다고 글로벌 사우스에 ‘판매’되지만,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거짓이다. 더 많은 국가가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추구한다고 해서 세계 총수요의 성장률이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전략을 모든 국가에 일반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실상 각국이 서로를 상대로 다윈주의적 경쟁, 즉 ‘이웃을 궁핍하게 만드는’ 전략을 추구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수출 주도 성장 전략 아래에서 일부 국가가 이전보다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다면, 이는 다른 국가들이 이전보다 더 낮은 성장률을 경험하는 대가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를 앞지르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는 국가들을 서로 ‘협력’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전략이 전반적으로 추구될 때 나타나는 효과는 사실상 비동맹의 포기이며,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서로 연대하던 발전 경로의 포기이다. 이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더 높은 GDP 성장을 달성하는 데 집착하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이를 위해 더 많은 중심부 투자를 끌어들이는 데 집착하면서, 이웃 국가들을 앞지르기 위해 오히려 제국주의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 이는 비동맹 운동의 분열로 이어지며, 이것이 앞서 언급한 두 번째 균열이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략 앞에서 글로벌 사우스 대부분 국가들이 보인 침묵은 처음에는 의아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리 의아한 일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국가’ 개념과 비동맹 개념을 모두 잠식해 왔으며, 이 개념들을 특징짓던 반제국주의적 핵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제국주의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대체 개념을 집어넣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결과는 바로 이 과정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그것에 맞서는 어떠한 집단적 실천에도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그 집단적 실천이 단순한 노동조합 행동의 형태를 띌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주체들을 분해하고 개별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통제되지 않고 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반식민 투쟁에 참여했던 계급 동맹을 해체하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집단으로 대응하려 했던 비동맹 운동을 전복함으로써, 이러한 경제 주체의 원자화 경향을 다시 한번 전면에 드러낸다.
현재 지배적인 대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촉진하는 정부들이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의 인민이 이란 인민에게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에 맞선 이란의 투쟁은 글로벌 사우스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출처] Two Fractures Effected by Neo-Liberalism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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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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