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재무장하며 민족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은 군비 증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려스러운 점은 일본이 전후 평화주의를 버리는 동시에, 그 평화주의를 필요하게 만들었던 전쟁 범죄를 둘러싼 수정주의적 역사관도 확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급속한 재무장 추진은 국내에서 확산하는 극우 및 민족주의 정서가 이끌고 있다. 출처: Red Shuheart, Unsplash

421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일본이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살상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새로운 수출 계획은 일본산 전투기, 미사일, 군함의 잠재적 구매국으로 최소 17개국을 대상으로 한다.

이 조치는 군국주의가 급격히 강화되는 시기에 나왔다. 일본과 호주는 불과 며칠 전 미쓰비시중공업이 호주 왕립해군을 위해 군함 11척을 건조하는 7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주 일본 자위대(SDF)는 처음으로 미국-필리핀 연합 군사훈련인 발리카탄 2026에 전투 부대로 참가했다. 자위대는 이 훈련에서 88식 지대함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이 해외에서 공격용 무기를 발사한 첫 사례다.

다카이치는 421일 발표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전몰자를 기리는 시설로, 2차 세계대전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1천 명이 넘는 인물도 합사돼 있다. 여기에는 전 총리 도조 히데키와 난징 포위전 당시 병사들에게 민간인 집단 학살을 명령한 마쓰이 이와네 장군도 포함된다. 일본 제국군은 193712월부터 중국 난징을 포위 공격했다.

이는 소름 끼치는 전개다. 오늘날 일본의 급속한 재무장 추진은 극우와 민족주의 정서의 급격한 확산이 이끌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일본의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와 동아시아 지배를 떠올리게 하며, 그 시기는 극심한 폭력과 잔혹함으로 점철됐다. 평화주의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곧바로 제국주의 일본의 공포로 회귀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반동적 흐름과 역사 수정주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려스럽다.

정책 변화와 반격 능력

이러한 변화는 구조적 전환을 떠받치는 일련의 흐름 가운데 가장 최근 단계에 불과하다. 일본은 3월 말 규슈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구마모토현에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체계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이는 통상적인 의미의 방어 태세가 아니라 전략적 방향 전환을 보여준다. 일본은 2019년 이후 중국을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했고, 이에 따라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를 제치고 최우선 안보 위협이 됐다. 그 결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규슈에 이르는 남서부 도서 지역을 지속적으로 군사화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지와 미사일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일본의 전후 헌법은 전쟁 수행 능력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금지한다. 그러나 일본은 변화하는 방위 교리를 이른바 반격 능력(counterstrike capability)’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제도화했다. 문서상으로는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대응할 권리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군대의 작전 체계와 사실상 구별하기 어렵다. 이는 자위권의 의미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자유민주당 정부들이 연이어 마련한 확대된 법적 틀 아래에서 일본은 이제 직접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동맹국이 존립 위협을 받는다고 판단하면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이름으로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존립 위협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엄격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일본은 사실상 거의 모든 상황을 존립 위협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개념은 거의 모든 비상 상황을 포괄할 만큼 탄력적이며, 긴장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모호하다.

다카이치의 우익 정부가 공식 개정을 추진하는 일본 헌법 제9조의 평화주의 조항을 지정학적 필요에 맞게 해석한 사례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54년 창설된 자위대 자체의 존재와 이후의 확대는 헌법이 명시적으로 금지한 군대를 사실상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일련의 신중한 재해석과 법적 편법에 의존해 왔다.

법적으로 특별 국가공무원으로 분류하는 자위대는 지난 30년 동안 상징적이고 인도주의적 성격이 강한 조직에서 종합적 작전 능력을 갖춘 군사력으로 변모했다. 중요한 전환점은 걸프전 이후 찾아왔다. 당시 일본은 미국 주도 연합군에 직접 군사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고, 일본 정치 엘리트들은 이를 국가적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동중국해 해양 분쟁, 대만을 둘러싼 긴장 고조 등 연이은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일본은 자위대의 역할과 활동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했다.

다카이치는 이미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는 가상 시나리오를 일본의 잠재적 존립 위기로 규정했다. 이러한 해석은 일본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이 없더라도 현행 안보법 아래에서 군사 개입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 일본은 이러한 법적 편법을 공식적인 군사력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제도화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고립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재무장, 즉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 수백 기 도입, 사상 최고 수준의 국방비 증액, 그리고 살상 무기 수출 제한 해제는 모두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와 긴밀히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역 동맹국들의 재군사화를 통해 중국 견제 전략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 결과는 일본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전후 국가 정체성을 규정해 온 제약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도, 과거 같은 길을 걸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성찰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폭력

오늘날 일본이 나아가는 방향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과거의 규모와 성격을 직시해야 한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을 자행했고, 그 결과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규모에 대한 추정은 엇갈리지만, 가장 보수적인 추산조차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역사를 특징짓는 것은 단지 희생 규모만이 아니라 폭력이 행사된 방식이다.

일본 제국군의 잔혹성은 난징 대학살에서 잘 드러난다. 193712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자 병사들은 수주 동안 살인과 강간, 파괴를 자행했다. 6주 동안 10~3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높은 추산치를 따르면 기업인, 선교사, 언론인들이 조성한 비무장지대인 난징 안전지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상 대부분 살해당했다. 일본군은 수만 명의 여성을 강간했다. 병사들은 종종 오락 삼아 집단 처형을 자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주민이 살던 지역이 텅 비었다. 시신은 거리 곳곳에 방치된 채 썩어갔다.

이런 행위는 통제가 무너진 병사들이 저지른 우발적 범죄가 아니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마쓰이 이와네 장군과 같은 지휘관들이 이를 알고 있었고 장려하기까지 하면서 조직적으로 실행했다. () 아이리스 장은 저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에서 이 폭력의 규모와 잔혹성을 치밀하고도 참혹하게 기록했다. 난징 대학살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한 학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수 있지만, 수많은 학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731부대는 일본 제국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인간성을 말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대는 1930년대 중반 이시이 시로의 지휘 아래 설립됐으며, 수천 명의 수감자를 대상으로 생물학·화학 실험을 실시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중국 민간인이었다. 연구진은 희생자들에게 페스트와 콜레라를 감염시켰고, 마취 없이 생체 해부를 진행했으며, 사람을 얼리고 절단한 뒤 무기 실험에 이용했다. 감금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고통의 규모와 국가 차원의 지원을 고려하면 731부대는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인체 실험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시이 시로는 1948년 미국 정부와 거래를 맺고 731부대의 인체 실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전범 기소를 면제받았다. 당시 미국은 이 자료를 자국의 생물학전 프로그램에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1959년 도쿄에서 자유의 몸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불린 조직적 성노예 제도도 운영했다. 일본은 점령지 전역에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인신매매한 뒤 군 위안소에 가뒀다. 피해자 대부분은 한국, 중국, 필리핀 출신이었다. 일본군은 이 여성들에게 신체적·성적 폭력을 가했다. 일본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생존자들의 증언을 부정하거나 축소했고, 때로는 완전히 외면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민족주의 정치인과 역사 수정주의 단체는 제국주의의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난징 대학살, 731부대의 인체 실험,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 성노예화가 가능했던 사고방식은 전체 인구 집단을 소모 가능한 존재로 취급한 더 광범위한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의 규모가 엄청났음에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책임을 인정했으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 진실을 가려 왔다.

냉전기의 면책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책임 추궁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일부 고위 전범들을 기소했지만, 그 과정은 의도적으로 제한적이었다. 냉전 초기의 긴장이 심화되자 미국은 정의 실현보다 봉쇄 정책을 우선시했다. 그 결과 얼마 전까지 제국주의 침략국이었던 일본은 동아시아의 전략적 동맹국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일본은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이자, 점차 중국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역학도 과거사 청산의 가능성을 약화시켰다. 일본 패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자신들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국제사회에 인정받기 위해 경쟁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새로운 전략적 중요성을 띠게 됐고, 광범위한 배상 요구나 지속적인 대립은 외교적 목표를 훼손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점령기의 참상이 중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배상 요구는 완화되거나 유예됐고, 때로는 철회됐다.

일본을 완전히 면죄하지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책임을 묻지도 않은 이러한 전후 질서는 전쟁 범죄에 대한 인정이 일관되지 않은 체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공간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변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프트파워와 역사적 망각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일본은 여러 측면에서 자국의 역사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었다. 냉전 구도가 일본을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미지와 인식의 차원에서도 또 다른 변화가 진행됐다. 세계가 떠올리는 일본은 더 이상 정복 전쟁을 벌인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후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소프트파워로서의 문화 수출이 있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만화, 비디오게임, 그리고 이를 둘러싼 광범위한 미적 산업을 세계에 확산시키며 친숙하고 창의적인 국가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서구에서 이러한 전략은 엄청난 효과를 거뒀다. 오늘날 세계 다수의 사람들은 일본을 과거의 침략국이라기보다 혁신과 문화 생산의 중심지로 인식한다. 이처럼 픽셀로 그려진 일본의 이미지 속에서 역사는 보다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의 홍수에 밀려 세계인의 기억 주변부로 밀려났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역사를 진주만 공격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정도로만 기억한다. 원폭 투하는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였지만, 이러한 기억은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자행한 참상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역사 인식의 완화는 해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 내부에서도 우익 세력은 오랫동안 교과서 개정을 추진하며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삭제하려 했다. 그리고 과거사를 둘러싼 논쟁이 국내에서 왜곡되거나 축소될수록 해외에서도 그 기억은 더욱 쉽게 희미해진다.

과거 청산 없는 재무장

일본의 평화주의를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은 민족주의, 역사 수정주의, 그리고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강해지는 정치 환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카이치와 장기간 일본 정치를 지배해 온 자유민주당은 이러한 변화를 이념적·물질적 차원에서 동시에 추진했다. 이는 군사력을 다시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을 단순한 경쟁국이 아니라 존립을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서사를 확산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담론은 군사력 확대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법률 해석의 변경을 정당화하며,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민족주의적 흐름도 더욱 노골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미야 소헤이가 이끄는 극우 정당 산세이토는 세력을 확대했다. 국가안보와 이민 문제가 주요 쟁점이었던 2026년 선거에서 산세이토는 득표율을 두 배 이상 늘리며 일본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 정당은 공개적으로 역사 수정주의를 내세우며 난징 대학살 같은 전쟁 범죄를 부정하고, 배제와 역사 지우기에 기반한 일본 우선주의민족주의를 주장한다.

동시에 언어와 행동 사이의 경계도 점차 무너지고 있다. 올해 3월 자신을 현직 자위대원이라고 주장한 한 남성이 도쿄의 중국 대사관에 강제로 침입해 신의 이름으로외교관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건은 군국주의를 재활성화하고 중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존립 투쟁의 언어가 점점 일상화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이 모든 일은 일본 제국주의 프로젝트가 붕괴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벌어지고 있다. 그 시기는 20세기 최악의 범죄들이 자행된 시대였으며, 역사가 보여주듯 일본은 그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은 군사력을 확대하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제약을 완화하며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와 더욱 긴밀히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 국가로서가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과거를 우회해 온 국가로서 이러한 길을 걷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멀지 않다. 일본이 다시 동아시아에서 보다 적극적인 군사적 역할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 문제는 역사가 똑같은 형태로 반복될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한때 그러한 폭력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다시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처] Japan Is Rearming and Embracing Nationalism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함자 셰흐리아르(Hamza Shehryar)는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문화, 국제 정치를 다루며, 특히 교차성(intersectionality)과 글로벌 사우스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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