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에이즈환자, 치료제 있어도 '그림의 떡'

초국적제약회사 BMS.로슈, "가격 올려라" 신약 국내 시판 거부

"만약 당신이 백혈병 환자인데, 약값으로만 연간 5천만 원을 내야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다소 황당한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어떤 대답을 할 지 알 수 없다. 만약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들이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떨까?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BMS, 5천만 원 안 주면 안 팔아?

최근 초국적제약회사인 브리스톨마이어스큅(BMS)과 로슈가 약값 인상을 요구하며, 백혈병과 에이즈 치료약의 국내 공급을 거부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BMS가 개발한 '스프라이셀'은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 복용 후 내성이 생긴 환자들이 복용해야 하는 치료제로 일명 '슈퍼 글리벡'이라고 불린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 해 10월 스프라이셀에 대해 보험적용을 결정하고, 한국BMS 측과 약가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BMS는 스프라이셀 1정당 6만9천135원이라는 가격을 제시했고, 이에 건강보험공단 측이 약가 인하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혈병 환자들은 스프라이셀을 하루에 2정씩 복용해야하기 때문에, 한국BMS 요구대로 가격이 책정될 시 하루 약값은 약 14만원, 연간 5천여만 원에 달한다. 이대로 가격이 결정되면, 이 약을 구입해 복용할 수 있는 백혈병 환자들은 극소수일 게 자명하다.

그러나 한국BMS는 약가 인하를 끝내 거부했고, 지난 달 1월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은 최종 결렬됐다. 결국 백혈병 환자들은 약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고, 이는 백혈병 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로슈,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 2004년부터 공급 거부

또 다른 초국적제약회사인 로슈 역시 자사의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판매 가격이 낮다며 지난 2004년부터 국내 공급을 거부하고 있다. 푸제온 역시 기존 약에 내성이 생긴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기전의 에이즈 치료제다.

지난 2004년 5월 국내 시판이 허가된 푸제온은 같은 해 11월 1병당 2만4천996원으로 보험에 등재됐다. 그러나 에이즈 환자들은 국내 약국과 병원 어디에서도 이 약을 구입할 수 없었다. 한국로슈가 가격을 문제 삼으며 국내 시장에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았던 것.

한국로슈는 2005년과 지난 해 가격 인상을 주장하며 건강보험공단과 약가협상을 벌였으나, 1병당 3만970원의 가격을 고수해 협상은 결렬된 상황이다. 한국로슈의 요구대로라면 푸제온 약제비용은 환자 1명 당 연간 2천2백만 원에 이른다.

"약값의 기준은 환자들이 먹을 수 있는 가격이어야"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백혈병.에이즈 환자단체와 보건의료단체들은 BMS와 로슈의 행태를 비판하며, 약가인하를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백혈병환우회, 한국HIV/AIDS감염인연대 KANOS,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등은 12일 삼성동에 위치한 한국BMS와 한국로슈 앞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고, 약가 인하와 즉각적인 의약품 공급을 촉구했다.

스프라이셀과 푸제온의 국내 가격과 관련해 한국BMS와 한국로슈는 각각 글리벡과 푸제온의 A7(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조정평균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BMS 측은 자신들이 제시한 스프라이셀 가격이 OECD 11개 국가에 비해 낮은 가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보건의료단체들은 "스프라이셀 약가 기준이 왜 A7 약가를 기준으로 고평가된 글리벡이어야 하는가"라며 "BMS가 수없이 강조하듯이 스프라이셀이 '환자들의 치료에 필수적인 약제'라면 그 약값의 기준은 글리벡이 아니라 환자들이 먹을 수 있는 가격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보건의료단체들은 그간 한국에서 약가 선정 시 기준으로 삼는 A7 약가의 참조책자가 실거래 가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해왔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가 지난 200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표적인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경우 한국의 약값은 2만3천45원인 반면, 실제 미국 연방정부 공급가격은(FSS)은 1만9천135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 국방부, 보건소, 해안경비대, 보훈처 등에 공급되는 이른바 BIG4 가격은 한국보다도 1만555원이 싼 1만2천490원인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스프라이셀.푸제온 가격, 미국보다 높아"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단체들은 스프라이셀의 미국 판매 가격과 관련해 "미국 연방정부 공급가는 6만2천 원이고, BIG4 가격은 4만3천 원 정도"라고 밝혔다. 한국BMS 측이 주장하는 OECD 가격과 관련해서는 "리베이트, 가격할인 등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실거래가는 이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럼에도 BMS는 '그 정확한 가격을 밝힐 수 없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푸제온 가격과 관련해서도 단체들은 "미국의 BIG4 가격은 1만9천806원"이라며 "또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푸제온 약값은 1병당 각각 2만7천567원, 2만6천140원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근거로 한국에서는 유독 A7 조정평균가를 요구하냐"고 반문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한국BMS가 한국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스프라이셀의 가격은 미국 판매가 보다 최대 2만6천 원 가량 비싸고, 한국로슈의 푸제온 가격 역시 미국 보다 약 1만1천 원 비싸다.

또 단체들은 미국 등 선진국인 A7 국가들의 약가가 높다손 치더라도, 이를 경제수준이 다른 한국에 단순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경애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는 "다른 선진국에서 약가가 높은 것이 한국에서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는 하등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며 "이는 한국이 독일 등의 선진국과 경제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며, 한국 환자들이 부담할 수 있는 가격이 선진국의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로슈, 푸제온 공급하지 않은 것 자체가 '살인행위'"

이날 기자회견 단체들은 "제약회사들이 만들어낸 약 중에서 이전 약보다 효과가 좋은 약은 단지 15%에 불과하고 나머지 85%는 이전 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효과가 떨어지는 약들"이라며 "이처럼 쓸모없는 약들을 블록버스터로 만들기 위해 광고, 판촉에 수십조 원을 쏟아 붓고 그 돈을 환자들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BMS의 경우 지난 2002년 기준으로, 마케팅 비용이 53억 달러(5조원 가량)에 달해 R&D 투자비용 23억 달러(2조억 가량)에 비해 2배가 넘는 규모다. 또 로슈의 경우 2007년 기준 전 세계 매출이 약 425억1천만 달러(약 40조원)에 달했고, 순이익은 25%인 약 104억 달러(9조 4천억 원)을 기록했다.

조 대표는 "의약품은 '명품 옷'이나 '명품 아파트'가 아니다"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옷이나 아파트는 입지 않고, 사지 않으면 되지만 의약품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진정한 '명품 의약품'은 비쌀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약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어야 있어야 한다"며 "약이 있어도 돈이 없어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약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석주 카노스 활동가는 푸제온 공급을 거부하고 있는 로슈에 대해 "환자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박탈했다"며 "로슈가 요구하는 푸제온의 약값은 '살인적'이며 게다가 2004년부터 지금까지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살인'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날 단체들은 "제약회사들이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더 많은 이윤을 내는 동안 국민건강보험은 내내 적자상태를 면치 못했다"며 "더 이상 초국적제약사들의 환자생명을 볼모로 한 '살인'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복부, 스프라이셀 '직권등재' 여부 결정 예정

한편, 약가협상이 결렬된 스프라이셀에 대해 보건복지가족부는 오는 14일 약제급여조정위원회를 열어 '직권등재' 여부를 결정하기로 해 주목된다. 스프라이셀은 '필수약제'로 지정되어 있어 약가협상이 결렬됐을 시 한국정부가 직권으로 보험 등재와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직권등재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지난 2004년 푸제온의 사례와 같이 BMS가 스프라이셀의 국내 시판을 거부할 경우 이를 규제할 법적 수단이 없다. 초국적제약회사의 '횡포'에 맞서 국민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한국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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