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 사전] 능력주의

[이슈③]

<공정공정 돌을 던지자>

① 비정규직 밥상을 엎은 ‘공정성’
② 뉴라이트부터 이준석까지, 포장만 바꿔 재탕하는 ‘공정 담론’
③ [워커스 사전] 능력주의
④ ‘디스토피아’가 오지 않도록…‘능력주의’ 부수는 논쟁 시작해야
⑤ 차별금지법과 함께할 ‘공정한’ 미래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기원을 알려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면 된다. IMF 이후,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은 토익 새벽반 강의를 끊었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다른 기업에 팔리고, 쪼개지고, 사장이 바뀌고, 사라지는 일을 그때 처음으로 당했다.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지옥의 서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평생직장 개념은 없어졌다. 물가와 집값은 계속 치솟는데 일자리는 불안했다. 하루아침에 잘리지 않으려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자기계발에 매달렸지만, 여기에도 돈과 시간이 들었으니, 실질 소득과 여가가 줄어들었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의 목록은 늘어났다. 능력은 평생에 걸쳐 갱신돼야 했다. 고사양 스펙으로 제품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처럼, 노동자들도 경쟁력 있는 신상으로 자기를 계속 출시해야 했다. 아이폰이 1에서 12까지 혁신하는 동안, 그만큼 맹렬히 자기를 혁신하지 못한 노동자는 구형 모델의 부품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혁신주의는 말했다.

‘국가도 부도난다’라는 경험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무능한 경영’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효율적 시장’으로 공공부문 관리를 넘길 것을 압박했고, 무능한 국가는 유능한 자본의 손에 차례로 쪼개져 넘겨졌다. 그 틈바구니에서 노동자들은 먼지처럼 떨려나갔지만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다.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인 사회는 그렇게 도래했다. 그때 ‘능력’이나 ‘역량’이란 말이 쏟아져 나왔는데, 우리는 ‘노동력’이 ‘능력’이나 ‘역량’ 같은 말로 대체되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다.

한국에서 ‘능력 중심 사회’란 용어는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다. 김대중 정부의 ‘신(新)지식인론’은 대표적인 능력 중심 담론이다. 당시 삼성 회장 이건희가 “한 사람의 뛰어난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며 내세웠던 ‘천재경영론’도 능력주의 아류다. 교육부는 이제 “학력이나 학벌이 아니라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는데, 그 말의 실제 의미는 ‘이제 학력과 학벌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능력까지 보여줘야 하는 시대’란 뜻이었다. 그즈음 ‘스펙’이란 낯선 용어가 등장했다. 사회적으로 스펙 열풍이 얼마나 심했던지 ‘스펙’이란 말은 2004년 국립국어원의 신어 자료집에 등재된다. 현재 국어사전에는 스펙을 ‘직장을 구하기 위해 학력, 학점, 토익점수 따위를 합하여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가 보여주듯이 스펙을 쌓는 목표는 ‘취직’이었다. ‘능력’은 곧 경쟁력이었고, 그 핵심은 살아남기였다.

2004년 서울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상대평가제도는 곧 전 대학으로 확산했다. 상대평가가 대학 운동을 궤멸시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학을 무한경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대학입시제도에서 입시경쟁 완화를 위해 도입된 수학능력평가와 학생부종합평가는 고교에서 ‘수행능력평가’로 대표되는 수시평가제도로 내신 경쟁을 격화시켰다. 획일적 시험에 대한 비판과 과정 중심의 다층적 평가라는 명분에서 도입됐지만, 당사자인 학생들에게 그것은 더 촘촘한 관리와 일상화된 경쟁을 강요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는 없어졌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한 번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았다. 만회할 기회가 없는 교육과정이 계속 반복됐다. 지독하게 버틴 시간은 보상돼야 했다. 그 보상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고, 기회비용까지 포함한 결과 보상은 당연히 차별적이어야 했다. 청소년기 내내 ‘네가 떨어져야 내가 살아남고 내가 나를 이겨야 한다’라는 경쟁과 생존의 원리를 착실히 내면화한 이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 ‘공정한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외치는 소위 ‘MZ세대’는 ‘인적 자원’으로 개발됐던 세대다.

지금 20대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 몰아닥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공세를 제대로 된 보호막도, 대항 논리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 안으며 자라왔다. 의탁할 곳이라곤 자기 자신 뿐인 청년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채굴하여 미래로 연결된 사다리를 놓는 것뿐이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끌어모아 가까스로 놓고 있는 사다리를 누군가 걷어 차버리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그게 누구든. 다른 것은 몰라도 사다리만은 공정해야 한다. 공정성에 대한 신념은 신자유주의의 토양에 뿌리를 내린 단단한 신념체계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한국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신분 사회보다 노동계급 해체와 관련된다.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노골적 계급사회를 위선적 계급사회로 위장하는 리버럴의 포장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에 부합하도록 노동자를 재창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차별의 여러 형태, 인종주의, 엘리트주의, 평가주의, 성과주의와 동일한 문법을 공유한다. 대신 능력주의는 인종주의처럼 사회가 부정적 가치를 부여했던 개념들을 ‘능력’이란 용어를 통해 긍정적 표상으로 전환했다.

‘학벌보다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삼성의 인재경영론과 학벌없는사회 운동에서 다른 의미로 함께 등장했는데, 이 또한 능력주의 개념에 내재한 양가성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확산은 신분 질서에 도전하거나 서열을 해체하는 반차별 운동과 평등주의 운동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학벌철폐 운동이나 차별반대 운동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간과한 결과였다. 그것은 구세대의 악습을 타파하는 새로운 세대의 저항운동 결과도 아니었다. 이전의 가족과 준거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적 차별의식을 개인화, 파편화한 형태로 전환한 차별주의였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차별주의였다. 그 결과 이전보다 더 냉정한 경쟁주의의 변형으로 귀결됐다.

‘학벌이 아닌 능력 중심 사회 만들기’는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국정과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학력 보지 말고, 스펙 보지 말고, 능력에 따라 대우하라는 말은 좋게 들리지만 실은 학력도 스펙도 변별력이 없어진 시점에 새로운 선별의 척도를 ‘실력(능력)’으로 제시하는 것 뿐이다. 이 추진전략은 다시 ‘국가역량체계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2014년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합동으로 국가역량체계 구축계획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교육과 일자리가 연계될 수 있도록 학교 교육, 직업교육, 평생학습제도, 자격제도 등을 ‘현장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 목표였다. 교육을 ‘현장 중심’으로 하라는 것은 산업 현장이 원하는 인력을 보급하는 것에 교육의 목표를 맞추라는 요구다. ‘능력 중심’이란 수미일관되게 기업에서 요구하는 능력이었다. 국가직무능력표준제도(NCS:National Competency Standard)가 대표적 사례다. NCS는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지식, 기술, 태도 등)’을 국가가 표준화한 것이다. 2002년 일-교육-훈련-자격을 연계하기 위한 ’국가직무표준제도’로 최초 도입됐고, 2010년에는 NCS로 명칭을 통일하고 주관부서도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일원화됐다.

이런 기조는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에서 차이가 없다. 직무능력은 철저히 기업 관점에서 분류 표준화되고 있으며 사용자를 위해 노동자가 맞추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NCS 홈페이지에는 ‘사업체 활용법’이 이렇게 나와 있다. 직무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채용하여 입사 시 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고, 직무 맞춤 교육으로 재직자 훈련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임금 부문에서는 노동자의 직무능력에 따라 적정임금을 지급하고 연공급 중심의 임금 체제를 직무급 구조로 바꿀 수있다. 연공급제나 직무급제는 노동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도인데, 그런 제도적 변화가 국가 차원의 사회적 논의도 거치지 않고 이런 ‘평가 표준화’를 통해 기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연공제 비판의 강력한 논리를 제공한다. 산업화 시대의 연공제는 위계를 통한 노동자 관리체제의 유용한 수단이었지만, 기술적 통제 등 신자유주의적 노사관리 기술이 발달한 단계에선 효용이 다한 것이었다. 기업부담이 큰 연공제를 혁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보수언론이다. 노동계에서도 연공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온다. 이철승 같은 사회학자는 연공제를 세대 불평등의 주원인으로 지목한다. 노동자들이 정규직 비정규직 간, 성별 간 임금 차별 해소를 위해 연공제 철폐와 직무성과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연공서열제’로 불리는 연공제 혹은 선임권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돼 마치 청산해야 할 적폐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선임권(seniority)은 1930년대 뉴딜에서 합의됐던 내용이고, 고용주의 자의적 해고로부터 노동자를 지키기 위해 노조가 먼저 요구했던 고용 관행이다. 일시적 해고에서 선임자를 나중에 해고하고 복귀시킬 때는 선임자를 우선 한다는 원칙인데, 이것은 현장에서 노동-자본 권력 관계 및 협상력을 고려한 것이었다. 자본은 단체협상 경험이 많고 현장 지도력이 있으며 회사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고참자 대신 부리기 쉬운 신참을 선호하고, 노조는 반대의 이유로 고참자가 필요하다. 물론 자본에 회유되거나 내부 권력화되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연공제의 타파가 곧바로 노동자 간의 평등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독재 시대의 잔재인 권위주의가 시장이 아닌 민주주의에 의해 해체됐어야 했듯, 사내 조직문화와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다. ‘연공제 대신 직무·직능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노동권에 대한 요구를 시장주의적 대안으로 대체하고 우회시킨다. 과거 길드와 같은 도제식 사업장에서 지켜왔던 연공서열제는 노동자의 숙련과 경험 자체에 대해 인정과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동자가 가진 기능에서의 탁월함만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보낸 시간과 삶에 대한 총체적 인정이었고, 그래서 시간이 없이는 어떤 기능적 탁월함으로도 마스터가 될 수 없었다. 특히 몸의 숙련과 경험은 육체노동에서 특히 중요하다. 반면 성과급제에 가장 먼저 적응한 산업이 금융이라는 점도 주목해볼 지점이다. 투자 컨설턴트는 오직 고객의 수익률을 높여주는 능력으로만 평가되고 철저히 그에 따라 보상받는다.

임금피크제나 직무급제가 계급 간 불평등을 세대 간·능력별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데 이용되는 대표적 프레임이라는 점은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노동계급 상층의 기득권화와 정치적 입장은 그것대로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노동귀족’과 같은 용어로 노노 갈등을 유발하고 일부를 전체로 속이는 자본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위험하다. 여러 논점이 있지만 능력주의가 철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연공제도 직능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도, 계급관점의 해석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 자주 경영 사례로 종종 언급되는 아르헨티나의 바우엔호텔 노동자들이 했던 것처럼, 청소노동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모두 동일임금으로 결정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걸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이다. 직무급제도 마찬가지다. 강도와 책임, 능력 등에 따른 직무의 상대적 가치를 ‘누가’, 어떤 척도로 평가하고 가치를 매기는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현실에서 직무급은 승진의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누가 오든 그 직무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원리를 승인 시켜 사람이 아니라 업무를 주인으로 만든다.

발명된 통치언어로서의 능력주의에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노동자 전체의 권리를 후퇴시키는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최하층 노동자다. 지금 안정된 일자리와 정기적 월급과 정년 보장, 근속 수당과 보상을 정말로 요구하는 노동자는 누구인가? 택시 노동자는 성과급에 반대하고 월급제를 요구하며 싸운다. 택배 노동자도 건당 수수료가 아니라 8시간 근무와 월급제를 요구한다. 청소 노동자들은 구성원으로서 근속을 인정받고 조금씩 월급이 오르면 좋겠다고 말한다. 능력주의는 이런 요구를 무력화하는 사회적 여론과 논리를 제공한다.

그동안 인정되지 않았던 저성과자 해고를 최근 대법원에서 인정한 판례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법에서 인정되는 징계해고, 정리해고 외에 업무평가를 통해 저성과자를 선별하고 이를 빌미로 해고하는 박근혜 정부의 일반해고 지침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해고 지침은 기업이 무능한 노동자를 언제든 자를 수 있는 근거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직무평가 결과가 해고로 이어질 수 있다면,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의할 수 없으며, 노조에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능력주의와 평가주의가 창조컨설팅 같은 노조파괴업체에서 개발한 기법과 결합할 때 대량해고의 무기, 즉 노동자들에겐 대량살상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평가’는 능력주의와 공정성 이데올로기의 핵심 기술이다. ‘능력주의’는 ‘평가주의’에 다름 아니다. IMF 때 다국적 평가 회사들은 국가를 평가하고, 기업을 평가하고, 개인을 평가하며 살릴 것과 버릴 것을 골라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의 선별 작업을 놀랍고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제 그 평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성적평가에서 직무평가까지, 신용평가에서 자산평가까지, 심지어 건강평가까지 모든 것이 평가의 카테고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평가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 됐다. 파시스트도 혁신했다. 군사 파시즘은 ‘총’을 들이댔지만, 오늘날 친절한 파시즘은 ‘평가표’를 들이댄다. 교실에서 복종의 수단이던 ‘매’는 ‘상벌 스티커’로 바뀌었다.

평가는 ‘차별’의 근거이며 차별적 보상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불만을 제압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하지만 평가의 공정성이나 폐해에 대한 불만이 나올 때마다 평가제도는 늘 자체적인 답을 갖고 있었다. 정시가 불공정하면 수시를 강화하고, 수시에서 불만이 많으면 정시를 확대한다. 학연·지연이 문제가 되면 블라인드 채용을 한다. 블라인드 채용에서 인재를 제대로 뽑을 수 없으니 ‘국가 직무능력 표준제도’를 개발한다. 그런 식으로 A-A’-A”로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는 평가제도는 어떤 경우에도 요구사항을 반영하여 보완할 수 있는 항구적 보완책이다. ‘평가의 공정성’은, 평가의 척도를 누가 만드는가와 누가 평가하고 누가 평가받는가 사이에 작동하는 평가 권력과 그것이 어떻게 지배와 통치의 수단이 되는지를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지금 능력주의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신호다. 구 파시즘의 통치이데올로기가 군국주의와 인종주의였다면, 오늘날 자본의 친절한 파시즘에서는 기술 대국론과 능력주의로 나타난다. 능력주의는, 자본이 요구하는 기술도 지식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을 ‘정리, 처분, 폐기, 도태’ 시키는 명분이며, 차별과 혐오의 근거이자 무능자에 대한 능력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다. 그동안 자본은 노동계급을 국가와 민족으로 나누고, 인종과 성별로 나누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분리하고 차별함으로써 지배해왔다. 지금은 능력으로 또는 직무와 직급으로 노동자를 나누고 분리해 계급을 해체하고, 차별을 통해 지배한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노동자들에겐 또 다른 ‘계급적 능력’이 있다. 단결과 연대의 힘이다. 자본의 능력주의, 개인화된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 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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