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공정 돌을 던지자」
① 비정규직 밥상을 엎은 ‘공정성’
② 뉴라이트부터 이준석까지, 포장만 바꿔 재탕하는 ‘공정 담론’
③ [워커스 사전] 능력주의
④ ‘디스토피아’가 오지 않도록…‘능력주의’ 부수는 논쟁 시작해야
⑤ 차별금지법과 함께할 ‘공정한’ 미래
파업은 아수라장에서 다시 시작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공단 본부 1층 로비를 점거하자, 그 주위로 거대한 경찰 띠가 둘러졌다. 경찰은 파업 연대자들도, 식사도, 약도 모두 막았다.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밥을 넣으려는 연대자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밥상이 엎어져 준비한 모든 음식을 폐기해야 했다.
▲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가 지난 6월 10일부터 21일까지 다시 한 번 전면 파업을 진행했다. [출처: 공공운수노조] |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는 지난 6월 10일 다시 한번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의 마무리 단계인 3단계(민간위탁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공단은 전환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의지가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올해 2월 공단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24일간 전면 파업에 나섰고, 이날 다시 재파업에 돌입했다.
민간에 위탁된 다른 공공부문 비정규직처럼 건보공단 고객센터의 노동 조건도 최저수준에 머물렀다. 경력과는 상관없는 최저임금과 하루 콜 수 120~200건, 콜 타임 2분 30초, 개인 이석 허용 시간 하루 10분, 감시체계, 생리휴가를 위한 증거 제출 등. 그뿐만 아니라 공공영역에서의 외주화는 자칫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약한 고리들을 만들어 냈다.
"연락이 끊어진 사람을 찾고 싶으면, 고객센터에 입사했다가 신상 정보를 조회하고 퇴사하면 돼요. 거주지 이력, 소득, 재산, 가족 등 굉장히 중요한 고객 정보를 다루고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정보도 들어가서 볼 수 있어요. 그 사람과 관련 있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고요. 보안 장치를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상담사들은 다 뚫을 수 있어요. 개인 양심상 안 하는 거죠. 예전에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 공익근무요원이 주민센터에서 개인정보를 빼내 범죄(1)에 이용한 것처럼 범죄는 여기서도 생길 수 있어요."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조합원 A씨)
노동조합은 노동조건 개선과 공단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직영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공단이 뒷짐 지고 있는 사이, 느닷없이 '공정성 시비'가 붙었다. 2월 파업 직전, 본인을 취업준비생이라고 밝힌 이가 청와대 국민 게시판에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직원의 공단 직고용을 반대합니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한 달 사이 6,000명 이상이 이에 동의했다. 이들은 '채용 과정'을 강조하며 필기와 면접 전형을 통해 최종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취준생뿐 아니라 건보공단의 정규직도 '공정 무시...직고용·직영화 철회하라'라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젊은 건보공단 직원들은 자체 모금을 통해 같은 내용의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언론은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며 「'노조의 떼쓰기' 거부한다」, 「"MZ세대의 공정성 주장...100% 공감"」, 「"건보공단 콜센터 직원까지 직고용? 공정 파괴"」 등의 기사를 쏟아냈다. 그렇게 '공정성' 논란은 또다시 비정규직 노동자의 발목을 잡았다.
파업 기간 내내 원주 본사 로비 농성을 벌인 김숙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지부장은 "우리가 로비에서 집회하면 정규직이 와서 1인 시위를 하고, 한쪽에선 이사장이 건보공단을 파국에서 구해달라며 단식을 했다"라며 "그런 기이한 풍경이 대한민국 노동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잘못된 정보와 노-노 갈등을 덧씌우는 프레임이 가장 힘들다"라며 "고객센터를 직영화해도 별도의 체계로 운영돼 정규직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닌데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마저 부정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고객센터지부는 지난 6월 21일 전면파업을 잠시 중단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능력주의', 비정규직 공격에 쓰이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위원은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에 대해 "'공정성'을 소환하기는 했으나, 그 핵심 정서는 오히려 '능력주의'인 것 같다. 이들은 안정적인 노동 조건을 누리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시험'을 그 '자격'을 검증하는 유일한 잣대로 여긴다"(2)라고 설명했다.
'채용 시험' 논란은 2016년 말 유은혜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교육공무직 법안' 철회 사건에서 시작됐다. 당시 한국교총, 임용고시 준비생들은 '역차별', '시험', '공정' 등을 내세우며 교육공무직 법 신설에 강하게 반대했다. 발의 배경과 내용이 곡해됐고, '정유라 법'이라는 조롱도 이어졌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교사 일자리로 바꾸어 임용한다는 내용조차 '비정규직을 교사로 특채한다'는 유언비어로 퍼져나갔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아우르는 교육노동자 현장조직 '교육노동자현장실천'에서 활동하는 정인용 씨는 당시의 반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교육공무직법안은 19대 국회 때도 발의된 바 있었지만, 조용히 묻혔기 때문이다. 정 씨는 "2016년 교사와 공시생들의 반발로 유은혜 법안이 철회되고, 2017년 정규직 전환 심의에선 겨우 10%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지금까지 내내 어려운 상황"이라며 "무엇보다 교육공무직의 정규직 전환 요구가 교사 공무원이 되려 한다는 오해로 고착돼 이를 푸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후 2017년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과 함께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인천국제공항, 서울교통공사, 한국도로공사 등에서 연이어 '공정성' 시비가 붙었고, 이는 건보공단으로도 이어졌다. 공정성 논란의 정점에서 '인국공 사태'를 남긴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는 결국 정부와 공사의 의도에 따라 자회사 설립과 경쟁 채용 방안 등이 관철됐다. 그리고 지난해 보안검색요원 직고용 과정에서 다시 한번 '인국공 논란'이 촉발됐다. 공사는 갈등을 수습하겠다며 보안검색요원을 자회사에 임시편제했다.
2018년 서울교통공사에선 일반업무직, 안전업무직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이 있었다. 정부가 무기계약직과 정규직을 나눈 이중적 인사제도를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다. 아울러 정원관리와 임금체계를 하나로 통합해 큰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입사 4년 이하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들은 '서울교통공사 공정연대(서공연)'라는 단체까지 조직했다. 서공연은 서울교통공사가 콜센터 상담사 정규직 전환 논의에 착수하자 '민간위탁 콜센터 직고용 반대' 침묵시위를 열었고, '노력한 자들의 분노', '기회는 불평등, 과정은 불공정, 결과는 역차별', '청년채용 기회박탈-정규직은 구조조정-콜센터는 직고용?' 등의 피켓 시위에 나섰다. 결국 공사는 최근 민간위탁 콜센터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전환'으로 가닥을 잡았다.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 실장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3단계에 해당하는 현장에선 직고용 요구조차 안 나온다.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의 투쟁은 현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사실상 마지막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능력주의 담론이 팽배한 이상 노동의 가치에 위계를 부여하는 시도는 계속 있을 것이고, 이는 정규직 전환 이후 보상 체계에 있어 계속 쟁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각주
(1)
n번방 공범 중엔 공익근무요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민센터 등에서 개인정보를 불법 유출해 범죄에 가담했다. 강 모 씨는 개인정보를 빼내 여성을 직접 스토킹하고, 여성의 딸을 살해하기 위한 모의까지 해 피해자는 국민동의 청원을 통해 이들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기도 했다.
(2)
《능력주의와 불평등》, 박권일 외, 교육공동체벗,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