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구경이 쉽지 않은 구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 12월3일 밤11시.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은 라인을 접수했다. 4일 아침6시30분 그들은 라인을 껐고, 오전9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3공장 대운동장에 집결했다. 금속노조 구미지부 오리온전기지회(지회장 박병돈)는 이렇게 1, 2, 3공장 모두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대우자동차노조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벌이기 시작할 때도 눈이 내리더니, 우리가 싸움을 시작하자 구미에도 눈이 온다"고 한마디씩 했다.
앞서 11월13일 회사와 채권단은 1천2백72명 인원감축과 공장의 분사, 용역, 폐쇄, 해외이전 등 회사의 완전분해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방침을 발표했다. '구조조정의 백화점'이라 부를만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고, 간단히 정리하자면 1천2백72명을 길거리로 내모는, 가족까지 포함하면 5천여명을 생존의 벼랑으로 밀어내겠다는 발표에 다름 아니다.
눈덮인 운동장에서 파업출정
노조는 이미 11월26일부터 1백30여명의 모든 간부가 파업을 시작했다. 전조합원이 전면파업에 들어간 12월4일 아침9시. 2천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이효진 조직1부장의 사회로 출정식이 시작됐다. 운동장 주변으로는 소위원회별로 친 천막들이 늘어서 있고, '노동자 다 죽이는 경영진은 자폭하라' '노예같이 살기 싫다 동지여 일어나라' 따위의 현수막도 내걸렸다.
손낙구 금속노조 부위원장을 비롯해 구미지역 다른 사업장 대표자들까지 대거 참석한 가운데 투쟁결의가 이어졌다. 투쟁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공연에 나선 구미지역율동패 '새날을여는일꾼들'은 오리온전기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광경을 소개했다. 이 회사 박태하 이사가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기 하루 전인 3일부터 1공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노숙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조합원들은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박 이사가 내건 명분은 "파업하면 회사가 망한다"였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이유가 바로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아내자는 것인데, 정작 그 일에 앞장선 관리자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이니 '적반하장'이라 해야할지.
이어 나온 오리온전기지회 노래패 '소리한줌'이 투쟁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군 뒤 운동장에 모인 조합원들 모두가 커다란 흰 천에 결의를 써 나갔다. 출정식이 끝난 뒤에는 6개 소위원회별로 토론에 들어갔다. 제조1과 역시 '파업가'를 힘차게 불러제낀 뒤 대의원들의 결의발표가 이어졌다. 한 대의원은 "무조건 투쟁입니다. 끝까지 투쟁합시다"라는 간단한 말로 이번 투쟁에 임하는 각오를 정리했다.
낮12시쯤 소위원회별 모임이 끝난 뒤 조합원들은 내일을 위해 퇴근하고, 간부와 사수대는 간단한 마무리집회를 가진 뒤 눈에 무너져 내린 천막을 다시 치고, 운동장을 청소하는 등 언제 끝날지 모를 파업투쟁을 위해 만반의 채비를 다졌다. 다음날인 5일부터는 모든 조합원 조를 짜서 공장을 사수하기로 했다. 남은 사람들은 커다란 천막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식사를 시작한다. 커다란 찜통에서는 다 익은 밥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또 다른 솥에서는 국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다.
"국과 함께 '승리의 확신'을 퍼줍니다"
'동지들'에게 국을 퍼주던 김상용 노사협의위원은 "노조간부라는 자리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노조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든지 관철될 때까지 가야한다"며 간부로서 투쟁에 임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 느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부가 흔들리지 않고 투쟁을 마무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조합원들의 경험이 많지 않고, 이번 투쟁이 장기화될 것이 예상되는 만큼 마지막까지 조합원들 한사람 한사람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가 열쇠"라고 말했다.
같은 시각, 민주노총 구미시협의회는 대표자회의를 열어 오리온전기지회 투쟁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했다. 일단 공권력이 투입되면 금속노조 구미지부는 모두 동조파업에 나서기로 방침을 밝혀놓은 터다. 김진학 코람지회장은 "우리사업장은 지회장 선거기간이라 동력을 이쪽으로 끌어오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그러나 어쨌든 기조는 공권력이 들어오면 동조파업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늦었지만 내일부터는 모든 간부가 이 투쟁에 결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구미지부는 오리온전기 구조조정 건이 터지자 곧바로 운영위를 쟁의대책위로 전환했다. 매일 집행회의, 매주 월·금요일에 쟁대위 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오리온전기지회가 간부파업에 들어간 날(11월26일)부터는 공단과 시내에 거점을 잡아 매일 출퇴근시간에 선전전을 벌여왔다.
금속노조 구미지부는 3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으며, 민주노총 구미시협의회는 1공장 앞에 천막을 쳤다. 지회는 노조사무실이 있는 2공장에서 천막농성을 하다가 파업에 들어가면서 큰 운동장이 있는 3공장으로 천막을 옮겨왔다.
금속노조 4천여명 연대집회
다음날인 5일에는 구미 광평 신도로에서 '정리해고 반대·생존권 쟁취·부실경영책임자 처벌 금속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오리온전기는 물론 한국중공업지회 파업대오와 금속노조 모든 지회 상근간부까지 4천여명이 참가한 집중투쟁이다. 이 투쟁에는 역시 파업중인 사회보험노조 대구경북본부 조합원들도 가세했다.
98년 현대자동차에 이어 올 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목숨'을 건 끈질긴 투쟁을 벌인 바 있다. 2001년 끄트머리에 구미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이 다시 '구조조정' 반대투쟁에 나서고 있다.
'구조조정안'은 회사 '공중분해'안
<'구조조정안' 뜯어보니>
사업전망 괜찮은 회사 공중분해하자니
딸린 노동자 1만4천여명…"백지화하고 회생방안 짜내야"
99년말부터 워크아웃에 들어간 오리온전기(대표이사 조한구)는 기업가치 평가기관인 아더앤더슨사의 실사결과를 토대로 고강도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구조조정안에 따르면 사업부별로 2공장은 완전히 폐쇄하고, 1공장은 해외매각, 해외이전, 외주화 등을 추진하며, 3공장도 분사시킨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 3천7백93명 가운데 1천5백37명을 구조조정한다는 것이다. 분사·용역전환 3백88명을 포함해서 전체의 1/3에 달하는 1천2백72명을 감원하고, 2백65명은 전환배치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인원정리, 해외매각, 해외이전, 분사, 외주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구조조정의 백화점'"이라는 게 금속노조 구미지부 조명래 부지부장의 설명이다. 그는 "회사는 1, 2공장에 대한 구조조정 안이라고 하지만 기업은 연관관계가 있어서 3공장의 전망까지 불투명하게 되는 것"이라며 "실제로 회사는 1공장을 매각하고, 12월15일부터 2공장 가동을 중단해서 일부 사업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며, 3공장 역시 분사 이후에 중국으로 이전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은행을 대표로 하는 채권단은 이러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오리온전기를 CRV(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로 넘겨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채권단에 따르면 부채규모가 크고 3년 연속 적자가 쌓이고 있어서 워크아웃이 끝나는 올 12월말까지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청산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 부지부장은 이에 대해 "오리온전기 회생이 아닌 채권단의 채권 회수만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리온전기의 사업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올 3/4분기에만도 6개월치 매출을 올렸고, 회사쪽 역시 '이후 최소 2년 연속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스플레이업체인 LG, 삼성, 오리온전기 3사가 세계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데, 오리온전기가 그 가운데 12%를 차지하고 있다. 오리온전기의 국내시장 점유율 역시 지난해 16.9%에서, 올해는 22.9%로 커졌다.
이에 따라 노조는 "오리온전기를 공중분해할 회사쪽의 구조조정안은 전면백지화해야 한다"며 채권단-노조-회사 3자교섭으로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는 지난 11월23일 82%라는 높은 찬성율로 파업을 결의하고도 대화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채권단과 회사는 어렵게 이루어진 '만남'에서도 "구조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체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그들이 노동자들을 '파업'까지 내몬 셈이다.
한편 오리온전기는 협력업체가 2백56개에 달하고 그 종사원만 1만4천여명에 달하는 국내 굴지의 디스플레이 업체여서 구미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지난 11월26일에 시장 등 기관장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간담회를 가진 결과 '구미경제와 오리온전기 살리기 범시민대책위'를 구성키로 뜻을 모으기도 했다.
[인터뷰]노조 박병돈 지회장
"어차피 장기파업, 함께 호흡하며 싸울 터"
조합원들 불안 속서도 자신감…힘있는 연대 절실
△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노조는 지난 4년 동안 임금동결, 복지축소, 희망퇴직 따위를 겪으면서도 고통분담을 통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도 회사는 지난 11월13일 2공장을 폐쇄하고 1천2백72명을 정리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노조는 채권단-회사-노조가 함께 모여 노동자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안을 만들어보자고 했으나 회사는 이마저 묵살했다. 결국 우리는 11월26일부터 전간부파업을 벌이며 교섭을 요구했으나 회사쪽은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오늘(12월4일)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조합원들 분위기는 어떤가.
=임단투가 아닌 구조조정으로 파업에 들어가다 보니, 불안한 심리가 있어서 회사쪽 눈치를 보는 조합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오늘 출정식에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내일은 금속노조 집중투쟁도 있기 때문에 동력은 더욱 살아날 것이라고 본다. 상황을 봐가며 대오 유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다.
△이후 투쟁은 어떻게 끌어나갈 것인가.
=어차피 장기파업을 예상하고 시작한 만큼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싸워나갈 것이다. 나는 지난해 위원장에 당선될 때 '정리해고로 오리온전기를 떠나는 조합원이 발생한다면 그것을 내 몫으로 받아 안겠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 구조조정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 지회는 물론 구미지부와 금속노조 차원에서 이번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조합원들과 함께 호흡하는 투쟁을 해나갈 것이다.
△연대투쟁이 필요하지 않은가.
=금속노조 구미지부는 쟁대위에서 오리온전기 파업현장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모두 동조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구미지역 다른 업종의 노조들도 같이 싸워나갈 결의를 밝히고 있다. 구조조정에 맞선 이번 투쟁은 오리온전기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므로 금속산업연맹과 구미지역 동지들이 힘있게 연대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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