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그 음습한 겨울(II)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사진-copyleft워킹보이스]

△정규직 대의원들의 지지와 엄호 하에 사내하청 노조 임원들의 현장순회는 정규직 조합원 정서상 진행할 수 없다.
△정규직 대의원들의 지지와 엄호 하에 사내하청 조합원 가입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정규직 노조가 사내하청 노조와 '공동투쟁체'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
△정규직 노조 교육실을 임시적으로 사내하청 노조가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지난 12월7일 기아자동차노조 광주지부 임시대의원대회 결정사항이다. 광주로 내려가기 전에 이 같은 결과를 들었을 때 기자는 "설마..." 했었다. 이번에 기아차노조 집행부로 당선된 현장조직 '현장의 힘'은 지난 4월부터 진행된 캐리어사내하청노조 파업과 관련, 캐리어정규직노조 이현석 집행부가 하청싸움을 제대로 지지엄호해 내지 못하고 있다며 얼마나 비난을 했었던가.


하지만 기아차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강동주 사무국장은 이 같은 대의원대회 결과에 대한 의구심을 조금은 풀어주었다.

"하청 문제가 단지 하청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얘기했지만 대의원들의 불안감은 쉽게 씻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도 집행부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청문제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하지 못했고, 하청노조도 정규직 정서에 대한 대응을 치밀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지부장님은 어찌됐든 관철시키려고 무려 5시간동안 밀어 부쳐봤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강 국장은 "몇몇 대의원들은 지부장에게 (하청노조 연대문제를) 일임해 줄 것을 제안했지만 다른 대의원들이 '무슨 소리냐', '독재냐'며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관철시켜내지 못했습니다"고 말한다.

정규직들에게는 캐리어사내하청노조가 조립룸을 점거한 사례만 부각시켜 "결국 하청노동자들이 공장을 말아먹을 것"이라는 자본의 공세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고, 현재 광주공장 전반에 걸친 고용불안이 팽배한 상황이기 때문에 하청노동자와의 연대에 정규직들이 완강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현 16대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한 것이 10월1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준비를 치밀히 할 시간도 부족했다는 설명이다.

강 국장은 "외부에서는 우리를 보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며 많이 욕할 걸로 보입니다"면서도 "현장에 가면 정규직 조합원들이 '당신 노조 조끼 입으면 다냐, 나도 조합원이다, 근데 왜 집행부가 하청노조 편만 드냐'고 따질 때면 나도 눈물이 나려고 합디다"며 한숨을 쉰다.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그래서 "하청문제는 결국 정규직들의 문제"라는 점을 끊임없이 교육·선전해 내면서 하청노조와는 노조 대 노조간의 연대활동으로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노조 내에 비정규직 담당 부서를 배치하고 적어도 하청노조 간부가 현장을 순회할 때 집행부가 동행키로 했다.

그 일환으로 이기곤 노조 광주지부장은 최근 승합차 라인 하청노동자 300여명을 2개조로 나눠 간담회를 했고, 불안정노동철폐연대(준) 관계자를 불러 정규직 대의원들을 상대로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정규직들의 정서가 이처럼 '반 하청'으로 돌아서 있는 데는 지난 99년 현대가 기아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변화된 노무관리 전략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와 관련, 고재한 하청노조 위원장은 "아시아자동차 시절에는 적어도 주임, 반장 선까지 회사가 통제를 했다면, 현대로 넘어가고부터는 조장 선까지도 회사가 장악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가족동반 야유회와 같은 현대 특유의 인간 친화적인 노무관리로 조반장들의 언로를 차단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장 정서 변화시켜내는 게 1차 과제

"테러 당할 상황까지 갔다니까요. 승합라인에서 회계감사와 같이 현장 순회하는 데 관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밀려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타고 온 승합차를 탔는데, 타이어가 찢어져 있더라구요. 모르고 차를 몰고 가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죠"

아찔했던 순간을 담담히 말하던 고재한 하청노조 위원장, "한번은 투쟁조끼를 입고 현장에 일하러 들어갔다가 조반장들하고 관리자들 30~40명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조끼를 벗으라고 윽박질러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은 조끼를 벗고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심 계속 버티고 싶었지만 같은 노동자들끼리 사소한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면 이를 반길 곳은 자본밖에 없더라구요. 억울했지만 조끼를 벗었죠."

하지만 조끼 사건이 있은 이후 고 위원장은 하루에도 서너개씩 박카스 같은 드링크제를 건네주는 정규직 형님들 때문에 오히려 힘을 얻었단다. "정규직 형님들이 볼 때도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 형편없거든요. 그런데다 해고까지 시키고. 노조를 만들어 활동을 하려고 해도 관리자들이 막고... 그런 모습들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예요"

비단 고 위원장 뿐 아니다. 하청노조 김태중 사무국장은 "점심식사시간은 물론 화장실 갈 때까지 조반장들이 따라옵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얼마나 성질 난다구요. 중식 선전전을 할라치면 20~30명 되는 현장관리자들이 둘러싸서 아예 얘기조차 못하게 막아버리죠."라며 현장 활동의 어려움을 말한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 위원장은 "최대한 불필요한 마찰은 없애기 위해 정규직노조나 저희나 모두 노력해요. 1차적으로 현장 정서를 옳은 방향으로 끌어내는 게 중요하잖아요"라며 고립되지 않는 하청노조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인가? 하청노조가 만들어지고 20여일 동안 나온 '투쟁속보'의 내용들은 하청노동자 조직화보다는 하청업체 정리를 필두로 한 기아차 광주공장 전반의 고용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 위원장은 "광주공장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폭로는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정규직도 하청들도 그 문제에 대한 인식들은 하고 있거든요. 이제 하청노동자 조직화에 집중하면서 2002년 6월로 예정된 남은 하청노동자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라고 말한다.

불법파견 시정 전국적 싸움으로 부상

하청노조는 2002년부터는 불법파견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킬 계획이다. 캐리어에서도 드러났지만,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이 용역, 하청 등의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쓰고 있는 것은 어쩌면 관례화된 일이다. 더군다나 정규직들도 일면 '해고의 완충지대'로 눈감아 온 것이 현실 아닌가. 그러나 관례화된 불법이라고 계속 방치한다면 제2, 제3의 캐리어사태나, 기아사태가 일어날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청에 이은 정규직 고용 축소로 몸집 줄이기 전략을 쓰고 있는 기아차 자본으로서는 불법파견 시정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해당 업무를 완전 도급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회사 고위 관계자는 광주지방노동청을 찾아 "노조에서 불법파견이라고 고발하지 않더냐"며 오히려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청노조 김태중 사무국장은 "지난 97년 부도사태 이후 고용불안을 절감한 현장 정규직들은 도급화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도급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비정규직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다소 굴절되긴 했지만 도급화에 대한 불안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감히 회사도 도급화 얘기를 꺼내지 못할 것입니다"고 말한다. 결국 하청노조는 불법파견으로 고발을 할 경우, 회사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하청노동자 정규직화 또는 라인 도급화인데 정규직과 연대하여 도급화를 막아낸다면 정규직화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만약 정규직의 힘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현재 상태에서 불법파견 고발은 사측의 도급화 전략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만 낳지 않을까요" 기자의 우려스런 질문에 노조 김 사무국장은 "현재 정규직 집행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나 도급화 반대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고용불안을 느껴본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은 상당한 수준일 것이고, 거기에 하청노조가 붙고 지역사회단체들까지 힘을 합한다면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오늘 5명이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합디다"

오후 6시, 노루꼬리만큼 짧아진 겨울 해가 벌써 어둠을 몰고 올 시각. 근처 식당에 집행부들이 다들 모였다.

"오늘 전화작업을 했는데 5명이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3~4명이 가입한다던데요"

집행부 8명이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 명단을 입수해 일일이 노조가입을 권유하는 전화작업의 결과다. 아직 조합원은 전체 하청노동자 900여명 가운데 100명도 채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일방적 정리해고에 언제 짤릴 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하나둘 노조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사직서를 쓰라고 전화가 온답디다. 사직서를 써야 위로금을 준다고..." "사직서를 많이 썼답니까?" "승합라인은 대부분 썼죠. 각 업체별로 사람들을 불러놓고 정해진 문구에다 사인만 하면 된다고 해서 대부분 그렇게 사직서를 쓰고 있습디다" "사직서 쓴 사람들 모아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합시다. 일방적으로 사직을 강요하는 꼴 아닙니까" "기자님, 잘 보세요. 결국 기아가 7개 업체에 계약해지를 통보했지 않습니까? 7개 업체는 하청노동자들 개별적으로 해고를 통보하고 이제 사직서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용승계와 같은 법적 대응시 그 근거를 없애겠다는 것이고, 다시 고용을 하더라도 근속기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식사시간이 따로 없었다.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행부들은 다시 저녁 출근투쟁을 위해 북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침보다 사람들이 많다. 인근 캐리어사내하청노조원들과 남총련 소속 학생들, 광주전남연합 소속 관계자 40여명이 모여 "정규직, 비정규직 총고용 보장하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근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제 출근할 날이 10여일도 남지 않은 정우길 조직부장이 집회를 마무리하며 야간조 작업을 위해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묵묵히 일해왔는데, 하루아침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아자본은 결국 광주공장의 장기적 전망을 내오지 않고 비정규직들을 먼저 해고한 다음에 노-노간 갈등을 부추겨서 결국 구조조정의 칼날을 정규직에게도 들이댈 것입니다. 비록 힘은 미약하지만 끝까지 투쟁해서 고용안정 쟁취해 내겠습니다"

집행부 8명 중 정 부장과 같이 12월31일부로 계약해지 되는 사람은 모두 6명이다. 이제 일상적으로 현장에 들어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간부는 이태영 부위원장과 김태중 사무국장뿐이다. 하지만 고 위원장은 "오히려 잘 됐죠. 비록 현장활동은 어려워졌지만 하루종일 노조활동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요. 정규직과의 연대를 강화해서 반드시 총 고용보장 쟁취할 때까지 투쟁하겠습니다"라며 주먹을 쥔다.

야간조 출근자를 뺀 나머지 집행부들은 다시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에 마련된 노조 사무실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명단들 다 챙겼죠? 너무 늦기 전에 빨리 전화합시다" 제대로 눈을 부칠 시간도 없다. 서둘러 전화통을 붙들고 노조 가입을 권유하면서 일방적 사직서 제출 요구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려내고 있다.

그렇게 광주의 음습한 겨울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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