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편집자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최근 한국축구의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축구 국가 대표팀 10명의 병역혜택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국가의 선택은 이들의 양심을 철창 속에 계속 가두는 것입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고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문화사회>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의 문제점과 과제 등을 쟁점으로 4차례의 기획 연재기사를 싣습니다.
양심에 따는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 개선
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란?
② 대체복무제도 현황
③ 사례소개
④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의 쟁점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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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가 아닌 산불속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 제2차 세계대전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
1. 2차대전시의 평화주의자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진주만이 침공당한 후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파시스트의 위협을 인식하면서 제2차 대전을 지지하였다. 오랫동안 이 전쟁은 "선한 전쟁"(the good war)으로 알려졌고, 이 용어는 전쟁기간동안 미국인들을 특징지었던 아주 드문 일치감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주 극단적 "선함" 對 "악함"의 경우에 있어서도 종교적,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 원칙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참여하기를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종교인과 비종교 일반인들 모두를 포함했다.
종교적 CO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평화교회들이었던 퀘이커(Quaker), 메노나이트(Mennonites), 그리고 형제교회(Bretheren)에 소속된 사람들이었고, '여호와증인' 뿐만 아니라 일부 모슬렘, 카톨릭, 유대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종교인들은 다양한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인도주의적 원칙들에 의해 행동하였다. 전투요원과 마찬가지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도 기꺼이 그들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국가를 위해 단순히 '죽이려'하지 않았다.
2차대전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갈등이었다. 약 350만에서 6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전쟁의 필요성, 불가피성, 그리고 영광을 확신하는 세계에서 추방된 사람들(outcasts)이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전쟁에 거부하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사회, 가족, 친구, 일터, 그리고 종종 시민공공서비스(CPS) 캠프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도 배척됨을 의미했다.
2. 시민공공서비스캠프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3만 7천 명의 CO들이 대체복무을 수행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에 자원하였다. 전쟁터의 위생병, 화재소방수, 정신병원의 보조원, CPS의 노동자 등으로 그들은 극적이고도 위험한 방법으로 국가에 봉사했다.
2) 캠프에서의 CO들
1941년 캠프에 온 사람들은 6개월간 머물러야 했지만 그들은 전쟁기간 내내 그곳에 머물고자 했다. 어떤 이들은 6년 동안 봉사했고, 일부는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947년까지도 풀려나지 않았다. 캠프에서 이들은 주 6일, 하루 9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고, 매달 정부에 숙식비로 35$를 지불해야 했다. CO가운데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고, 대부분은 평화교회 교인들의 헌금에 의하여 지불되었고, 교회는 CO들에게 매달 2달러 50센트씩 제공하였다. 이들 가족에 대한 아무런 지원이 없어서 CO가족의 많은 이들이 전시에 극도의 빈곤상태에 있었다. 이들에게 부과된 업무는 종종 make-work(노동자를 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시키는 불필요한 작업)이어서,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자 열망했던 CO들은 대개의 경우 좌절하곤 했다.
교회지도자들은 CPS가 '전시 평화에 대한 영적 증언의 기반'으로서의 유토피아적 평화주의 공동체를 건설할 기회라는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의 CO였던 스티브 캐리(Steve Cary)는 CPS 캠프를 완벽한 동물원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 "그 캠프에는 박사들, 풀브라이트 수상자들,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주식중개자들, 발레 댄서들, 무신론자들, 근본주의자들,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 점이 아주 캠프를 아주 멋진 곳으로 만들었다."
2차대전시의 법적 양심에 따른 거부자는 CPS 캠프에서의 대체복무 혹은 군대에서의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하는 것 등 두 개의 선택이 주어졌다. 이 캠프는 후에 민권운동이나 평화운동에서 사용된 비폭력 저항의 기법을 연마하는 요람이 되었다.
3. 2차 세계대전시 대체복무제
2차 대전시 대체 복무를 수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 전역의 152개 시민공공서비스 캠프에 억류되었다. 대부분은 이전의 시민보호군(Civilian Conservation Corp)의 막사나 산림서비스 캠프에 수용되어 먼 지역의 식목, 화재 진화, 도로 건설, 댐 건설 등의 고된 노동을 하였다. 다른 이들은 기생충으로 시달리고 있는 공동체를 위한 위생시설 건설, 가난한 시골지역의 의료소 운영, 비행청소년, 농업실험, 토지보전 계획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이보다는 법에 의해 약속된 더 의미있는 일, 즉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수년동안 캠프에서 노동한 후에야 CO들에게 비로소 정신병원, 인간 모르모트, 국립공원의 산림소방원 등의 파견근무가 허용되었다.
1) 정신건강 개혁
CO들이 국가적 복지에 장기적으로 의미있게 기여했던 것은 약 20개 주의 41개 정신병원과 12개 주 17개의 정신지체아를 위한 훈련학교에서 복무한 것이다. 1942년경이면 정신병원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시산업에서의 보다 높은 급료의 일자리를 찾아 떠난 때였다. 정신병원의 엄격함에 대항하여, CO들은 환자들을 돌보는 데 '비폭력적 방법'을 도입하였고, 환자들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위해 버지니아 주정부에 대한 소송에서 승리하였으며, 후에 '국립정신건강재단'이 된 조직을 설립하였으며, 1946년에는 <라이프 잡지>의 폭로기사를 통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왔다.
2)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소녀들
CO들의 부인을 포함하여, 병역을 거부한 많은 여성들이 병원업무에 동참하였는데, 300명의 여학생 평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을 COGs로 불렀다. 이들은 당시 영부인이었던 엘리노어 루즈벨트의 시민공공서비스(CPS)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하였다. 그녀는 이전 한 신문 칼럼에 "CO들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다"고 쓴 적이 있다. COGs의 방문을 받은 후 그녀는 CO들이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병원의 수준이 극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썼다. 이러한 접촉으로 그녀는 역사적 평화교회 멤버들과 함께 일하고 전후 '국립정신건강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3) 인간 모르모트
약 500명의 CO들이 위험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말라리아, 전염성 간염, 부정형 폐렴, 발진티푸스 등의 치료를 위한 인간 모르모트가 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자원하였다.
CO였던 닐 하트만(Niel Hartman)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물론 '노란 창자'(겁쟁이를 의미) 같은 것 등 온갖 종류로 불리는 데 신경을 썼다. 나는 앰뷸런스차의 운전에 자원했다. 그러나 American Filed Service는 거절하면서 CO는 너무 많아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젊었고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내게 모르모트가 될 기회를 제공했을 때, 그것은 내가 단지 누군가를 죽이기를 원치 않을 뿐, 내 자신의 몸에 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계획과 꼭 맞아떨어졌다.
4) 산림소방원(지상접근이 곤란한 화재 현장에 낙하산으로 강하함)
1942년 뉴딜프로그램이었던 시민보호군(Civilian Consevation Corps, CCC)이 해체되자, CO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서부 전역에 걸쳐 산림의 화재현장에 투입되었다. 화재예방과 산불소방작업에 CPS 노동의 1/4가 차지하였고, 가장 정예화되고 위험하여 CO들이 선호한 업무는 바로 산불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1943년 여름 최초 그룹이 형성되었을 때, 300명의 시민공공서비스(CPS)요원이 자원하였다. 루크 버키(Luke Birky)는 메노나이트 smoke jumper camp에서 최초로 훈련받은 6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240명의 CO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몬타나, 아이다호, 오레곤 등의 기지에 분대로 배치되었다. 지독한 바위투성이 지역에 뛰어들거나 겨우 실습에서 배운 방법을 사용하면서 그들은 화재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확대되기 전에 새로 산불이 난 지점에 바로 낙하산으로 접근했다.
4. 2차 세계대전시 전쟁터의 CO들
미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CO들에게 두 개의 선택이 주어졌다. 하나는 군대에서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민공공서비스에서 대체복무를 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시 CO 가운데 25,000명이 비전투 위생병이나 군목 혹은 군종신부로 봉사하였다. 이들은 군대에 등록되어 있었고, 군복을 착용했으나 다른 사람들을 사살하는 것은 거부한 것이다. 소속된 부대의 다른 위생병과는 달리, 이들은 직접 전쟁터로 무장을 하지않은 채 참여했다. CO 위생병이었던 데스몬드 다스(Desmond Doss)는 포화 속에서의 용기있는 활약으로 의회가 수여하는 영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자료집에서 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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