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안 mulu@kdlpnews.org
서울 정동 옛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과 직원 아파트를 짓는 문제가 갈수록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명박 서울시장이 신축반대를 약속했던 취임 전 입장과는 달리 연이은 말바꾸기로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어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은 단순한 국민감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관련법규에 의거해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지난 12일 제59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강연에서도 다시 한번 “법대로 해야 한다”고 말해 건물 신축에 반대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취임 전 이 시장이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시민모임)’의 질의에 대해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을 반대한다”고 밝힌 공개적인 답변을 스스로 뒤집은 것.
당시 이 시장은 “덕수궁 일대의 역사성과 문화재 보존 등을 감안할 때 대사관 직원용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덕수궁 일대를 문화지구로 지정해 우리 역사문화유적을 보존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시민단체 반응
이 시장의 이같은 말바꾸기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40여개 시민단체들로 이뤄진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은 지난 2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덕수궁 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에 대한 이명박 서울시장의 태도변화를 비판하는 집회를 갖고 거리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시민모임은 “문화주권 수호차원에서 덕수궁터 보존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의지를 시장이 단순한 반미감정으로 왜곡하고 있다”며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시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천준호 시민모임 집행위원장은 “이 터가 미 대사관으로 넘어가게 된 데는, 1984년에 을지로 미문화원 부지, 송현동 미대사관 직원숙소 부지 등과 덕수궁 터인 경기여고 부지를 맞바꾼 서울시의 책임이 크다”며 “대체부지를 마련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서울시장이 말바꾸기나 일삼으며 ‘법대로 하겠다’는 것은 곧 문화주권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미대사관·아파트 신축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건립예정 부지가 조선시대 역대왕들의 영정을 모셔둔 선원전 등이 있었던 옛 덕수궁 터라는 점. 땅 속에는 지하에 유물이나 유적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아 시민단체나 학계에서는 문화재 훼손을 우려하는 입장이다. 강찬석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해서 문화재를 파괴하고 대규모 복합 외교공관단지를 조성할 권리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이는 문화유산의 역사성을 망각한 처사”라고 말했다.
■ 경과
덕수궁터 미대사관 신축 논란은 지난 6월 미대사관측이 옛 덕수궁 터에 2004년까지 8층짜리 직원용 아파트 1개동 54가구를 짓고 2008년까지는 지상 15층 규모의 대사관을 신축하겠다며 건설교통부에 협조를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미대사관측은 지난해부터 서울시측에 아파트 건립허가를 요청했으나 서울시가 20가구 이상 아파트의 경우 주차장·어린이 놀이터와 같은 부대시설을 의무 설치해야 하는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을 들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해당 아파트가 시행령 적용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건교부에 시행령 개정을 요청한 것이다.
건교부는 당시 미 대사관 신축을 허용하고 직원용 아파트 역시 외교관 시설인 만큼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에 예외조항을 신설해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반대 여론이 커지자 철회했다. 그러나 건교부 주택관리과 김동수 서기관은 건교부가 “주택건설촉진법 등 관련법의 법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시민단체들은 △덕수궁 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계획의 완전 철회 △옛 덕수궁터 재매입 △대체부지 마련 △정동 일대를 문화지구로 지정해 특별 관리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건교부·외교통상부 등 관계부처는 “문화유적 지표조사에 협조한다”는 입장만 공유한 채 미국과의 협상에서 서로 총대를 메기 싫어 이 문제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미 대사관·아파트 신축 허가권자인 서울시청 문화재관리팀은 신축 허가와 관련 “서울시 내부에서도 검토 중이기 때문에 답변하기 힘들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여전히 ‘건설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는 미 대사관 측은 지난 9일 대사관 건물과 아파트의 조감도를 공개했다. 조감도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내려다보는 구조로 돼있어 시각적·정서적 거부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101호] 8.26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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