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정미 woodfish@kdlpnews.org
지난 23일 이영자씨(65)를 만난 곳은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이었다. 이 곳에서는 한총련합법화대책위원회(대표 강만길 외 5인) 주최로 ‘한총련이적단체규정 유엔인권이사회 제소’를 위한 기자회견과 토론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총련 문제는 학생들 문제만이 아니야. 국가보안법에 관한 문제잖어. 우리 남편도 국가보안법 피해자인데 당연히 우리 문제이기도 하지.”
신향식씨는 68년 여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6개월 복역 기간동안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으로 출소했다. 이후 75년 박정희 유신정권이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발효시키자 공안기관의 감시를 피해 잠적한 그는 76년 2월 29일 남민전준비위를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79년 10월 검거될 때까지 미·일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검거 후 법정투쟁을 계속 벌인 그는 80년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고 결국 82년 10월 8일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새벽에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닥쳐서 남편을 데려갔어. 며칠 지나서야 통혁당 사건이라는 걸 알게됐지. 그때까지 난 우리 남편이 그런 일과 관계돼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출소 후 공안기관의 방해로 제대로 직장을 잡을 수 없던 남편은 형사들의 눈을 피해 잠적을 한다. 그리고 이영자씨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전적으로 생계를 꾸려가게 됐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일까. 79년 남편이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자 남편의 대학 친구중 한 명이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영자씨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 것이다.
“건축 일을 하던 분이었는데 자신의 건물 지하 방 5개를 그냥 내주면서 하숙을 치라는 거야. 전혀 돈 안 받고 그냥….”
그러나 이 또한 수사기관의 방해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내가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거야. 먹고살기도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딨어. 여하튼 날마다 집에 찾아와서 협박했어. 그래도 내가 하숙을 계속하니까 건물 주인들을 데려다가 감금시켜놓고 협박까지 하더군. 그래서 그냥 그만두고 잠시 형사들 안 볼 수 있는 곳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했지.”
이영자씨의 3남매 중 장남을 제외한 두 남매는 현재 미국에 가 있다. 그러나 주요 감시대상에 올라있었던 이영자씨는 95년까지 여권이 나오지 않아 미국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자식들 얘기가 이어졌다.
“내가 유가협 일은 물론 여기저기 집회나 행사 있을 때마다 체력이 되는 한 다 다닐려구 하거든. 그런데 사정이 있어 못 가게 되면 우리 큰며느리가 애들 데리고 대신 가. 큰아들은 퇴근하면 행사장에 와서 애들 데리고 집으로 가고.”
어느새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잘 자라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고마운 마음은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급기야 어려서부터 대학 때까지 쉼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며 생활비를 마련했던 큰아들에 대한 얘기에 이르자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는 남편없이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온 과거는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남편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 함께 녹아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개정이 아니라 폐지가 돼야 해. 빨리 폐지돼서 우리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좋은 맘으로 살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
[ 101호] 8.26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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