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한국노총의 독자창당 선언, 어떻게 볼 것인가

최형익(노동자의 힘 회원)

한국노총이 이번 대통령선거를 겨냥하여 독자정당의 창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정치세력화 방식은 노총위원장 등이 기존 거대 보수정당의 안정권 의석에 포진하여 개인의 정치적 출세 방편으로 이용하거나 정책연합이라는 미명하에 기성정당과의 이권분할 계획에 참여하는 형태였다. 이와 달리 이번 독자창당안은 대규모적이고, 무엇보다 노총 스스로 정당을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을 제출한 것으로 향후 노동자 정치운동의 지형은 물론 한국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어떤 형태로든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노총은 왜 독자창당을 모색하게 되었는가.

한국노총은 자신들이 현재까지 다양한 정치활동 방식을 시도해왔으나 조합원들의 정치세력화 요구를 수렴하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자체 평가하면서, 현재의 정세적 상황을 창당의 이유로 제시한다. 첫째, 기존 정당과의 정책연합이나 지분확보 방식은 노총 전체의 정치세력화 또는 조합원의 정치진출을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불확실성이 배가된 선거정국에서 승자편승 전략이 더 이상 용이하지 않다. 일관된 정치행보를 요청하는 이같은 정국하에서 노총이 더 이상 왔다 갔다 하는 등거리 정치행태를 반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97년 대선과 달리 2002년 대선정국은 노총이 스스로 결의 수준을 드높여 능동적으로 국면을 열어 나가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창당의 변이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노총의 정치세력화란 명백히 조합적 이익을 중심에 놓는 이익집단 정치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 노동시장 중심의 노동운동이 갖는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정치영역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자기 조직에 속한 조합원들의 이익이 현상유지의 수준에서 보장되기는커녕 상당 정도 훼손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독자창당이라는 형태의 정치세력화로 나설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기반하여 정당의 이념을 '사민주의'로 설정하는 가운데, 창당의 구체적 경로로는 민주노동당과의 연대 -> 한국노총과 공동 재창당 -> 당의 외연 확대를 현재의 단계에서 실현가능한 가장 용이한 방안으로 제시한다. 민주노동당과의 연대를 통한 공동 재창당이 현실화될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 대통령선거에서 한 표 한 표가 금같을 민주노동당의 이해관계에서 보나, 한국 노총이 제시하고 있는, 당장의 대선보다는 향후 총선 등에서 의회내 교두보를 확보하며, 2008년 의회장악, 2012 대선을 통한 집권이라는 장미 빛 청사진 역시 민주노동당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볼 때도 이 두세력간의 정치적 협상을 통한 재창당은 그리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노총, 특히 그 상층부가 자주적 노동조합이라고 불릴 수 없을 만큼, 반공주의와 자본에 포섭된 하위 파트너로 가능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보수적이고 보신적인 집단이 정당 창당이라는 자칫 잘못하면 조직의 해체를 조장할 지도 모를 험난한 길로 몸소 나서게까지 되었냐 하는 것이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상적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노총 조합원들의 정치적 요구가 독자정당의 창당이기 때문이다. 자체 설문조사에서 60% 이상의 노총 조합원의 과반수가 일관되게 독자정당 창당을 선호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국노총 조합원에 비록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이 결과는 현재 기층서민 대중의 정치적 정서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일관된 테제로 정립된 바 있듯이 이는 억압과 착취가 가중되고 있는 지금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실정에 실정을 거듭하는 무능력한 지배집단의 이전투구 앞에서,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변화를 열망하는 대중적 정치의식의 좌선회의 표출이 급기야 한국노총의 상층부 노동귀족들의 엉덩이를 뜨겁게 하여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실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이들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현재 한국노총과 민주노동당이 표방하고 있는 이익집단의 정치에 가둘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 사회경제적 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자-민중의 계급정치의 주체로, 그 응축된 에너지를 민중복지, 민주주의, 노동해방의 길로 폭발시켜 나아가게 할 것인가가 좌파 정치세력에 던져진 최대의 화두라 하겠다.

한국 정치지형의 단면도

다른 한편으로, 한국노총의 독자 창당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현실은 한국 정치사회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엄존하는 변화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다. 자못 해방 직후의 정치정세가 재현되는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전평 등 좌파 정치세력의 대중적 헤게모니가 우세했다면, 현재는 분단 50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위 '질서'를 수립한 우파의 헤게모니가 우세하다는 것일 테다. 아무튼 한국 노총의 이러한 정치방침으로 일단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그 어떤 집단의 정치세력화의 장애란 없다. 장상 전 총리서리의 국회동의안 부결상황을 둘러싼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우파 여성주의 세력도 '이제는 정치다'라는 기치 하에 일로 매진할 것이며, 신사회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시민운동, 환경운동 역시 그 간의 경험에서 제도 권력의 잇점과 그 마력 앞에 일단 노출된 상태다. 여기에 민주노동당, 그 왼쪽으로 노동자의 힘을 위시한 좌파정치단체 등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대변하고 있는 세력들이 총 출동하여 일대 회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해방이후 초유의 사태전개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자민련 등 해방 이후 온갖 기득권을 누려온 극우세력은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배집단의 내부 계급투쟁이 극에 달하면 부르주아 사회를 보전하고자 군부 등 적나라한 폭압세력이 정치전면에 등장한다는 게 고전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정치적 상황의 핵심은 그 모든 외피를 걷은 채 계급의 적나라한 절대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이다. 일부 수정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우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자유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비의 베일과 영험을 뒤로 한 채!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현재의 한국사회를 보라.

좌파정치세력화의 대안은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기 나름이다. 한국노총 및 민주노동당이 표방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세력화 방안은 명백히 조합주의적 이익에 기반에 이익집단 정치의 전망임이 명백하다. 자기는 아니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유시민이 주창하는 시민개혁 정당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노총의 정당 방안은 솔직한 인상마저 든다. 하지만, 조합주의적 정치의 귀결은 계급적 종속을 영구히 재생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있다. 문제는 이들 조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의 영향권 하에 놓여 있는 인민대중을 어떻게 계급정치의 관점에서 모아낼 수 있게 하는 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매우 어렵고 장기적인 전망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전략적 사안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대통령 선거는 밑천 다 놓고 사생결단을 벌어야 하는 판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데올로기 투쟁말고 좌파 공동의 정치투쟁의 경험, 내부 투쟁이 아니라 전체 대중을 놓고 전개할 수 있는 전국적 정치투쟁의 경험이 이번 대선을 통해 축적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