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반미주의'

의정부 여중생 사건을 계기로 '반미'가 우리사회의 핵심의제로 떠올랐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월드컵 당시를 떠올리게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미국 현지로 달려가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항의대표단의 모습이 뉴스를 장식하고 인터넷의 많은 게시판에는 이 사건에 항의하는 표시가 올라가 있다. 숨진 여중생을 추모하고 미국에 항의하는 대열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연예인들에 대한 화제도 끊이지 않는다. 봇물처럼 터져 나온 국민의 분노는 때맞춰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선거전과 맞물려 미묘한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친미보수세력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회창 후보가 '부시대통령 사과'와 '소파개정'을 주장하고, 여중생 추모집회 참석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뉴스는 그 미묘한 기류의 일단을 보여준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반미' 또는 비미(批美)정서는 이제 보수세력조차 일정 부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부시사과'나 '소파개정' 요구 또는 '여중생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정말 '반미' 수준에 값하는 주장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회창 후보가 느닷없이 여중생 집을 방문하고 '부시사과'와 '소파개정'을 들고 나온 것을 두고 그가 '반미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보수논객으로 잘 알려진 <월간조선> 조갑제 사장이 이회창 후보의 최근 행보를 두고 '보수적 기회주의'라는 비난은 했을 망정 반미주의자라는 낙인은 붙이지 않았던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니까 '부시사과'나 '소파개정'이란 주장이 '반미정서에 편승하는' 정도는 될지 몰라도 그 자체로 대단히 반미적인 구호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수주의자 조갑제도 내심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외국 군인이 죄없는 여학생을 무참하게 탱크로 깔아 죽이고도 아무 거리낌이 없고, 그 재판조차 우리 손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은 반미니 친미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상식 이하의 일이다. 그러니까 광화문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소파개정을 한 목소리로 외치는 국민들의 의식과 정서는 반미 이전에 최소한의 인간적 상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 최소한의 상식조차 '반미'로 낙인찍히고 반미는 곧 '용공'이고 '친북'이라며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이고 보면, 광화문을 뒤덮고 미대사관 앞을 점거해버린 젊은 함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여중생 사건은 오랜 몰상식의 역사를 뒤집고 마침내 최소한의 상식이 보편화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이에 대해 이런저런 손가락질을 해대는 보수언론과 세력을 보면, 현재국면이 반미와 친미,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 심지어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이기 이전에 여전히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국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신세대 나름의 '정치실천' 방식

오랜 금기의 벽을 뚫고 최소한의 반미주의가 상식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새로운 세대 특유의 문화적 특성이 한 몫 하고 있다. 80년대 세대에게 반미가 때로 생명까지 걸어야 할 만큼 무거운 정치적 주제였다면, 새로운 세대에게 반미는 정치적 사안이기보다는 문화적 사안이다.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한 촛불시위가 삽시간에 조직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오노의 금메달 강탈에 분노하고 남북한 갈등을 조장하는 007영화를 보이콧하면서 신세대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아주 쉽게 꿰뚫는다. 전쟁 이후 오랜 세월 주입된 '우리를 북괴의 마수에서 구해준 미국'이라는 신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모세대와 달리 그들은 아주 쉽게 미국의 실체에 맞닥뜨리며 아무런 선입견 없이 미국의 잘못을 비난한다. 그러고 보면 신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저간의 평가도 정확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에 반응하며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에너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우리 사회의 향방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이번 대통령 선거도 예외가 아닐 터이다.


김창남/ 성공회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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