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에 앞장서고 궂은 일 도맡았던 호루라기 사나이"
배달호 열사는 1953년 김해에서 태어났다. 김해에서 공고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81년에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다. 부인 황길영씨와는 83년에 결혼해 슬하에 딸 둘(선혜 - 고 3, 인혜 - 고 1)을 두고 있다.
87년 한국중공업에 노조가 결성되면서부터 열사는 노조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집회가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갔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실천하는 조합원이었다. 많은 조합원들은 열사를 '대의원보다 노조활동에 앞장섰던 조합원'으로 기억한다. 87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선우회를 결성하여 해고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91년 대의원을 맡으면서 '활동가'로 변신했다. 조합원들의 권익이 침해당하면 관리자들을 상대로 앞장서 항의했다. 노사대책부장(쟁의부장 역할)을 맡았던 95∼96년과 2000년을 빼고는 계속 대의원을 맡으며, 현장을 지켰다. 2000년에도 현장위원, 사수대 활동에 참여했다. 95∼96년 한중노조 사무국장을 맡았던 김종환 조합원은 당시 열사의 활동에 대해 간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공장 구석구석에 깃발을 꽂고 다니는 등 솔선해서 실천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했다"고 말한다.
열사는 또한 남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지구대장(공장별 야전 사령관 격이며 중앙쟁의대책위원이 된다)과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에 이르기까지 상급단체의 파견대의원을 단골로 맡다시피 했다. 95년에는 조카뻘 되는 이웃노조 간부들과 함께 마창노련 쟁의국 활동을 벌이는 등 연대활동에도 늘 앞장섰다. 함께 간부 활동을 했던 조합원들은 철야농성, 출근투쟁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고, 노조(지회)의 것이든 상급단체의 것이든 '지침'에 대해서는 칼같이 지켰다고 입을 모은다.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은 배달호 열사를 '호루라기 사나이'로 떠올린다. 대의원 조회 때고 중식집회 때고 늘 호루라기를 불며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기 때문이다. 열사의 부인은, 빨래할 때마다 열사의 주머니에서 호루라기가 나왔다고 전한다. 열사의 작업장이었던 보일러공장 입구에는 "휘익~~ 어이, 빨리 안 모이고 뭐하노? - 열사의 호각소리가 귓전에 맴돕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열사의 현장 활동에 힘입어 보일러 공장은 지금도 두산중공업 지회에서 현장 조직력이 강한 부서로 손꼽힌다. 보일러 공장은 또한 자체 투쟁기금을 모아 간부와 조합원들이 간부파업이나 상경투쟁 등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으면 보상해주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사는 열성 민주노동당원이기도 했다.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 대선에서 누구보다도 앞장 서 월차를 내고 선거운동 참여했다. 자칫 소홀히 하기 쉬운 민주단체들의 재정마련 티겟 판매에도 현장을 훑고 다니며 꼼곰히 챙겼다.
"일도 확실했던 '스카핑의 1인자'"
생전의 열사는 일에 대해서도 '확실한 사람'으로 통한다. 배달호 열사는 스카핑 머쉰이라는 기계를 가지고 일했다. 보일러 판넬을 가공하는 공정의 한 가지이다. 같은 반에서 일했던 조합원들은 열사가 '스카핑의 1인자'로 통했으며, 남보다 두 배, 세 배 일을 했다고 말한다. 한국중공업 시절 열사가 노조활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면서도 해고와 같은 중징계를 당하지 않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열사가 조합원들 속에 남긴 발자취는 크기만 하다.
단조공장 최호경 대의원은 배달호 동지가 80대말 단조공장에 파견되어 함께 일할 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으며, 노동자 스스로가 나서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늘 강조했다"며 "7일날 같이 구속동지들 면회를 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원두희 조합원은 열사가 89년인가 전태일 평전을 주면서 조심해서 읽어보라고 했던 일을 기억에 떠올리다. 원 조합원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노조 대의원과 상집간부를 맡는 등 노조활동에 나섰다. 원 조합원은 "형님이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이 출퇴근 할 때 늘 다니는 길을 분신 장소로 택한 것도 그렇고, 또 주위에서 확인해 보니 분신하기 전에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다니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며 "항상 밝게 웃고 다녀서 눈치도 못챘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보일러 공장의 또 다른 조합원은 열사가 분신하기 며칠 전 듣지 않을 줄 알면서도 "'이제 형님도 노조활동 그만두고 편하게 살아라'고 했더니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해고자들이 어렵다'면서 해복투 계좌번호를 적어주었다"고 말한다.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한 조합원은 "회사 관리자들이 형님이 분신한 이후 현장에 와서 고인에 대해 '스카핑도 잘 못 했고, 일도 안 하고 뺀진뺀질 했다'며 고인을 모독하길래 항의한 적이 있다"며 두산의 악랄한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보일러공장에서 반장을 맡고 있는 한 조합원은 열사에 대해 생산 현장에서도 "자기 맡은 일을 다 하고, 남이 급하면 늘 도와주려고 했다"며 "청소도 도맡아서 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 사람"
열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같은 보일러 공장의 김건형 대의원이다. 지난 해 6월 물량반출을 막기 위해 관리직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고,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3개월 휴직을 하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비보를 듣고 한 걸음에 달려 내려와 빈소를 지키고 있다. 열사와 같은 해에 입사해 20년 넘게 같이 일했으며, 98년부터 고인의 권유로 대의원을 맡으며 노조활동에 나섰다. "달호 형님과는 실과 바늘 사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김 대의원은 지난 해 11월 18일 조합원들의 파업찬반 투표 참여가 낮아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다가 관리자의 방해에 항의하여 휘발유를 온 몸에 끼얹기도 했던 적이 있다. 김 대의원은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고인이 자신을 불러 "왜 쓸데없는 생각 하느냐. 살아서 싸워 꼭 이기자"고 격려했다"며 "나 한테는 그렇게 말 해 놓고 형님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눈물을 쏟았다. 배달호 형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10일부터 단식을 하고 있는 그는 열사에 대해 "대인 관계도 원만했고, 무엇보다도 도리에 어긋난 걸 못 참는 성격"이라고 회고했다.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고인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12일 밤 11시, 빈소에는 한 조합원이 영정 앞에 꿇어 앉아 "제 목숨 끊어 버리면 노동조합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열사의 부인은 "남편 옆을 지켜야지요"라며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분신 당일부터 줄곧 해고자 방에서 지내고 있다. 열사의 부인은, "함께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느 날은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함께 보고, 꽃다지 공연도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그동안 제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흔들림 없이 남편의 뜻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고 힘들었는데, 유서를 보고 나서는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열사의 부인은, 노동자들이 파업 중에 마산역에서 집회를 열면 수박을 사서 함께 달려가기도 했다며 "다른 사람들은 마음은 같아도 행동은 힘든데, 남편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사람이에요."라며 남편을 회고한다.
"노동자 공원묘지에도 다니고 하더니 결국 자기도 갔네요."
열사의 부인이 쓸쓸한 표정으로 덧붙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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