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 "차라리 '짹'소리라도 내고 죽자"

전국 5천여 농민 모여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 쌀수매가 인하저지' 요구해 전농, "노당선자 농민들 모두 죽일 것 불보듯 뻔하다"

"농기계에 손가락 잘리고, 농협 빚은 7천 3백만원이나 되는데..."

전남 해남에서 올라온 이길용(59세)씨는 왼손에 쥔 쌀 나락 한 주먹을 소중히 쥔 채 한숨처럼 내뱉었다. 이길용씨의 뒤에는 자식뻘 되는 전투경찰들이 열을 지어 서서 성난 농민이 정부종합청사로 행진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방송차량에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구호를 외치는 이길용씨의 오른손 중지와 검지는 농기계에 잘려나가 뭉툭했다.

벼농사에 고추, 고구마, 배추 등 밭농사까지 함께 짓고 있는 이씨는 "쌀 팔아서 빚은 갚아야 하는데 농민들이 출자해 만든 농협이 쌀 전량수매도 안하면서 영세농민을 다 신용불량자로 만들어서 다른 금융기관에서도 단돈 백원도 대출 받을 수 없게 되었다"며 "논, 밭 팔아 빚 갚으려 해도 빚지는 농사를 누가 짓겠나, 살 사람도 없다"고 토로했다. 더군다나 이씨의 논밭은 20년전에 쌀 25가마, 3백만원 하던 것이 이제는 쌀 10가마도 안되는 150만원의 가격이 매겨지고 있고, 쌀 전량수매도 되지 않아 현재 이씨의 창고에는 쌀 7백 가마가 쌓여 있다.

15일 칠레 대통령이 서울에 방문해 한-칠레 자유무역 협정에 공식서명을 할 예정이다. 도울(Dole), 선키스트(Sunkist) 등 미국계 다국적 기업을 주축으로 한 6대 메이저 농업기업이 전체 수출물량의 70% 이상을 취급하고 있는 세계적 농산물 수출국 칠레의 농산물이 한국의 농업에 직격탄을 날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정부의 쌀 수매가 2% 인하 방침은 WTO 협정 이후 120%나 증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농민들의 좌절과 한숨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14일 서울 독립공원에서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주최로 진행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 쌀 수매가 2%인하 저지 전국농민대회'에서 전국에서 모인 5천여 농민들은 "어떻게 지켜온 농업인데 정부가 하루아침에 포기하겠다는 것이냐"며 울분을 표출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 박병국 회장은 "DJ 정권은 '농업을 살리겠다'고 해놓고 농민에게 무슨 억화심정이 있어 물러나는 지금까지 배타고 50일이나 가야하는 지구반대편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농민들을 죽어나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농민을 제물로 해서 협상하려는 음모는 가만히 둬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전국연합 오종렬 의장은 "노 당선자가 경제논리, 농촌복지를 내세우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농업을 피폐화시켰던 것이 경제논리고, 농촌 노인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경로당에 기름 넣어주겠다며 농민 생존권이랑 바꾸자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WTO로 농업개방압력을 넣고 있는 유럽선진국들도 각종 이름을 붙여 자기네 농민들에게 80%씩 보상해주고 있는데 노당선자는 '농민단체가 투쟁일변도라 문제다'라는 발언만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오 의장은 또한 "양처럼 순한 농민들이 무얼 그리 많이 투쟁해서 무엇이 그리 망가졌냐"며 "프랑스가 농민들의 저항을 등에 업고 미국과 당당히 협상해 자기네 농업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나라 대통령도 농민들의 투쟁을 등에 업고 미국, 선진국과 당당히 협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포도회 정재정 대표는 "참새도 죽을 때 '짹' 소리 내고 죽는다고 하는데 우리 농민들도 '짹' 소리 한번 내고 죽어보자"며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포도만이 아니라 전체 농업이 망하게 된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또한 "우리 농업을 지킬 사람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닌 '지금 차라리 죽자'고 말하고 있는 우리 농민"이라며 "오늘 집회 오는데도 농림부에서 전화해서 '포도회는 참석 안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지만 죽을 흉내를 내서라도 싸워 막아야 한다"고 강한 결의를 밝혔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정현찬 의장은 "우리 농민들은 빚에 쪼달리면서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왔는데 이 나라 위정자들이 하루아침에 농업을 포기하려고 한다"며 "2-5ha의 농사를 짓는 전체 8.2%의 농민들에게 소득직불제를 한다고 하면서 92%의 농민들은 다 포기한다고 하는 것이 농업을 살리겠다는 것이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 의장은 또한 "쌀 수매가 2% 인하는 차기 정권에서 시행되는 것인데, 결국 노무현 당선자는 정권을 인수받기도 전에 농민들을 농촌에서 내쫓는 가혹한 선물을 한 것"이라며 "농업을 꼭 지킨다고 약속했던 노무현 당선자가 대통령이 되면 이땅 농민을 모두 죽일 것이 불보듯 뻔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농민들은 "차라리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서명되는 청와대에서 피를 토하고 죽자"며 정부종합청사와 외교통상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으나 도로 한가운데에 8대의 전경차량으로 바리게이트를 세우고 막아서는 전경들에 막혀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농민과 학생 10여명이 방패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후송되는 등 부상을 입었으며, 취재 하던 기자의 카메라가 파손되기도 했다.

"농사 때려치우고 도시 나와도 먹고 살 길이 없다"며 경찰에 항의하던 농민들의 '농업주권' 상여는 전경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길바닥에는 자식같이 소중한 나락과 귤, 사과들이 뒹굴었다.

오후 6시경까지 경복궁역 근처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농민들은 한나라당이 농민대표들과의 면담에서 "한칠레 협정 반대를 당론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소속 의원들이 비준 반대 서명에 동참토록 하겠다, 쌀 수매가 인하 반대를 당론으로 정하겠다"고 밝힌 것이 전해지자 한나라당사 앞으로 이동했다.

한나라당사 앞에 집결한 3백여명의 농민들은 한나라당사안 진입을 시도하며 몸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농민들은 한나라당사 앞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한 후, 15일까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저지를 위한 투쟁을 계속 진행할 결의를 다지고 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 쌀 수매가 2%인하 저지 전국농민대회 결의문

우리는 현 정권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농업포기정책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 없다. 우르과이라운드협상이후 아무런 대책없는 농축산물의 수입개방으로 농가소득이 감소하고 농가부채가 122%나 증가했듯이 우리농업은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고 농민들은 삶의 포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김대중정권은 이러한 상황에 더욱 불을 내지르려고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농업전반에 걸쳐 몰락만을 초래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밀실협상을 통해 강행 체결하고 양국 정상의 서명을 앞두고 있다. 농업 강대국인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은 포도 등 국내 과수 산업은 붕괴뿐만 아니라 소고기, 닭고기 등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는 축산업의 몰락도 더욱 재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칠레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우리 농산물 시장을 공략할 미국을 위시한 농산물 수출국의 개방압력은 거세어 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협상도 해보기도 전에 쌀수입개방 불가피를 외치면서, 식량주권을 포기하고 미국 다국적 기업에게 생명줄마저 내맡기겠다며 쌀수매가를 2% 인하하겠다는 김대중정권의 방침은 민족농업의 완전 포기선언이다.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더라도 작년 쌀생산비가 2001년 대비 8.1% 증가했는데도 수매가를 2% 인하하겠다는 것을 그 누가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 김대중정권은 WTO농업협상을 앞두고 농민들과의 구체적인 협의도 없이 WTO회원국의 모범생이라도 되려는 듯이 일방적으로 농산물협상제안서를 제출하는 상식이하의 짓을 또다시 하고 말았다. 우리의 뒤통수라도 치듯이 하빈슨 의장 초안은 미국과 케언즈그룹 등 농산물 수출국의 입장을 대부분 반영하여 관세와 보조금 대폭적인 감축안을 내놓았고 이 안으로 협상이 완료될 경우 우리 농업은 심대한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김대중정권의 농업포기, 농민말살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며, 농업회생과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농업포기 농민말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즉각 중단하라!
2. 국회는 만약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시 비준 거부하라!
3. 농업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추곡수매가를 인하하려는 정부방침을 반대하며, 국회는 농민단체가 제시한 최소 3%이상 인상하라!
4. 쌀수입개방 기도 중단하고 쌀생산비를 보장하라!
5. 정부는 WTO농업협상에서 하빈슨 의장이 제시한 관세, 보조금 감축안을 거부하고 농민단체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새 협상안을 마련하라!
4. 신자유주의 개방농정 철폐하고 식량자급, 농가소득보장, 통일대비 농정을 수립하라!

우리의 요구는 작금의 농업농촌을 회생시키기 위한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400만 농민의 요구가 무시되고 농업포기정책이 일방적으로 강행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2003년 2월 14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반대 전국농민대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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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 , 농민 , wto , 쌀 , 한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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