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위에서는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나

허울좋은 협약들 제대로 지켜진 적도 없어, 결국 구조조정의 들러리 기구로 확인

민주노총 1기, 사회적 합의기구 선제안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직후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주창한 1기 지도부는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노사공익중재단을 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96년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이후 외환위기 정국인 97년 12월 3일 구조조정과 대량해고의 파고와 대중투쟁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먼저 정부에 제안했다. 대선 직후인 12월 말 김대중 정권이 공식 출범하기 전에 정권인수위는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를 구성하자고 화답했다.

정리해고 수용으로 시작된 노사정위, 대대회에서 뒤집혀

결국 98년 1월 15일 제 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고 2월 9일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합의 됐다. 권영길 위원장의 대선출마 사퇴로 인해 배석범 수석부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조합원 정리해고에 동의했고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진 끝에 2월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사회협약을 부결시켰고 1기 지도부 체제는 총사퇴로 막을 내렸다.

이후 민주노총 혁신과 대중투쟁 강화를 내세운 이갑용 지도부가 들어섰고 2기 지도부는 5월는 총파업을 벌였다.

이 와중에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2기 노사정 위원회가 출범했고 민주노총은 근로자 파견제 남용 방지 논의, 근로시간 단축방안 논의, 제도개선 방안 논의 등 온통 ‘논의’로 채워진 노정 현안 합의를 정부와 체결하고 6월 10일로 예정됐던 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다시 노사정 위원회에 참여했다.

노사정위에서 보인 갈지자 행보

2기 노사정위는 노동계의 요구에 따라 ‘공공부문 구조조정 특별위원회’와 ‘금융산업 발전대책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정부는 퇴출기업과 퇴출은행,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결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7월 10일에 노사정위원회 불참선언을 했고 7월14일에서 16일까지 공공, 공익, 금속, 금융산업 연맹 중심으로 총파업을 전개한 후 다시 7월23일 노정간 합의하면서 총파업 방침을 철회했고 7월 말에 2기 노사정위원회는 다시 열렸다.

물론 7월23일의 합의 역시 퇴출 금융기관과 55개 퇴출기업 노동자의 고용대책 논의, 정리해고 사업장의 평화적 분규해결, 노사정위 위상 강화등 공문구로 채워졌다.

허울이나마 노사정위가 재가동되는 가운데 정부는 9월에는 만도기계 투쟁에 공권력 투입, 금융기관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방안 강행등을 꾸준히 시행했다. 결국 다음 해인 99년 2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를 구조조정의 들러리 기구로 규정하고 탈퇴할 것을 결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사정위 참여해서 정리해고 합의한 지도부의 이후 행보

한편 노사정위 결합과 정리해고안에 도장을 찍은 1기 지도부의 이후 행보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82일의 파업을 이끌어 승리를 거둔 삼환기업 노조위원장 출신이었던 배석범 직무대행은 이후 모 공기업 감사를 지냈고 김대중 정권의 신당프로젝트인 새천년민주당 창당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17대 총선 공약심사위원을 지냈고 작년에는 ‘노동계 지도자’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성명서에 심일선, 이목희, 박태주, 지재식 등과 함께 참여했다.

당시 교섭단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김영대 부위원장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에서 맹활약을 펼친 김씨는 총선에서도 노동계를 휘져으며 열린우리당 운동에 앞장섰으나 비례대표 하위순번을 받아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다. 현재 김씨는 근로복지공단 감사를 지내고 있다. 최근 근로복지공단은 도시철도공사 노동자들의 산재 불인정과 근골격계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강화 문제로 지탄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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