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5월을 보내고 6월이 오면 나는 언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 기다리곤 한다. 물론 그날도 달력에 기록한다. ‘매미 울다.’ 매미의 생에 대하여 알게 된 후 생겨난 버릇이다. 짧게는 오륙년, 길게는 십 오륙년을 캄캄한 지하세계에서 살다가 불과 보름 남짓한 지상의 삶을 찾아 목숨을 건 우화(羽化)를 감행해야 하는 삶이라니!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다시 날개 달린 성충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매미의 짧고도 고달픈 생이라니!
그런데 모든 매미가 우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화에 실패한 매미를 본 적이 있다. 과거의 몸뚱어리에서 다가올 삶을 향해 새로운 육신이 빠져 나오다가 그만 비를 맞았던 모양이다. 두 개의 생명이 하나의 형태 안에 갇혀져 죽은 채로 굳어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잠시 전율하였다. 미래를 향해 맹렬하게 운동하던 현재의 생명체가 과거의 틀 안에 갇혀서 죽어버린 매미의 딱딱한 시신은 무섭고도 징그러웠다. 그것은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다.
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학생들에게 더러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언젠가 나는 설명을 마친 후에 우화에 실패한 매미를 보여주었다. 강의실이 일순 잠잠해졌다. 그들도 어떤 고통 같은 것을 맛보았던 모양이다. 형태만 기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는 죽어버린 매미의 비극적인 전 생애와 시간의 의미를 말했다. 어떻게 <과거>가 <현재>를 구속하여 <미래>마저 잡아먹어 버리는지 곰곰 생각해보기 바란다고도 했다.
올해는 매미들 울음소리가 여느 해와는 달리 한 달 정도는 실히 늦었다. 처음에는 몇 년 전의 혹독한 추위 때문이려니 했다가, 유난히 길고 지루한 올해의 장마를 떠올리기도 했다. 아마도 이유는 복합적일 테지만, 나는 매미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교정에서 희미하게 매미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3주 전이다. 해마다 너무도 우렁차게 울어대서 책 읽는 것까지 헤살 놓던 녀석들인데, 올해는 위세가 많이 약해졌다. 그들도 강렬한 햇살이 그리운가 보다.
지금 책상 위에는 제법 큰 말매미가 조용히 누워있다. 짧은 생을 마치고 영면에 든 것이다. 아까 낮에 가로수 길을 걷다가 운명 직전에 있는 녀석을 집으로 가져왔다. 어릴 적에는 포충망,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잠자리채를 들고 이런 녀석을 한 마리라도 잡아보겠다고 설쳐댄 적도 있었다. 물론 언제나 허탕이었지만. 그 시절보다 매미들의 개체수가 많이 늘어났는데, 도회지의 녹지비율이 높아지고, 강력한 천적인 조류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고 한다.
나는 죽어있는 녀석이 성공적으로 짝짓기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길지 않은 시간을 성충으로 살아남아서 세상을 비행하다가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에 그나마 안도할 따름이다. 어느 때인가 양버즘나무 (플라타너스) 위에서 까치가 매미를 잡아먹는 광경을 본 일이 있다. 시끄럽고 더러우며 이기적인 까치를 워낙 싫어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까치는 아예 기피대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나는 까치에게 돌멩이를 집어서 던지기도 한다.
한 마리의 매미가 울면 다른 매미들도 경쟁적으로 울어댄다. 일종의 동류의식이랄까, 아니면 짝짓기를 위한 경쟁이랄까, 뭐 그런 게 작용하는 듯하다. 마치 한여름 밤에 단체로 울어대는 개구리를 연상하면 될 듯하다. 그런 울음소리에서 나는 더러 절박함 같은 것을 읽는다. 그들과 의사소통은 되지 않지만, 어딘가에 대고 집단적으로 항의하거나 해원(解寃)을 요구하는 소리로 들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하던 일 멈추고 상념에 잠기고는 한다.
지금 온 나라가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시끌벅적하다.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세력과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의 힘겨루기가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총력전 양상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투쟁>에서도 있었고, 얼마 전 포항제철 본사에서 있은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그러했다.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높이 들고 ‘아니라’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의 정부’를 뒤이은 ‘참여정부’가 존재한다. 국민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소망하여 붙여진 의미 있는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참여정부에서 국민의 참여정도는 과연 만족할 만한 수준인가, 묻고 싶다. <부안 방폐장 문제>, <새만금 물막이 공사문제>, <대북송금 특검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과연 참여정부는 국민들의 참여를 얼마나 진실하게 묻고 들었으며, 그 결과를 정책에 반영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 진실하게 외치면 들어야 한다. 그의 목소리가 하늘 끝까지, 땅속 깊은 곳까지, 바다 넘어 수평선 끝까지 들리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항상적인 국민투표’라는 말이 있다. 주권재민의 뜻을 받들어 그들이 지금 무엇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는지, 왜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하고 투쟁하며, 거리로 몰려나오는지 재삼재사 숙고해야 한다. 정책을 먼저 결정해놓고 일방적으로 통고하거나, 요식행위로 공청회나 열고 하는 얕은 수는 이제 그만 둬야한다.
준비도 되지 않은데다가, 협상능력도 불투명하며, 결과까지 불확실한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참여정부가 그토록 애달아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가 선진적인 모델로 생각하는 일본마저 장기간 준비했다가 파기해버린 자유무역협정을 왜 끝까지 고집하면서 많은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을 존중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공정하게 논의할 수 있는 틀부터 만들 일이다.
‘호시우행 虎視牛行’이라는 말이 있다. 늦어도 확실한 것이 좋다는 말이다. 참여정부가 언제부터인지 소의 걸음걸이를 버리고, 여우의 잰걸음으로 전환했다는 혐의가 든다. 열아홉 달 지나면 참여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의 출범을 진심으로 축복했던 나는 참여정부가 오늘날 보여주는 행태에 동의할 수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며,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실패와 과오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다가올 오류는 최소화해야 한다.
지루한 장마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매미들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많은 매미들이 천상으로 날아올랐는지, 또 얼마나 많은 매미가 기나긴 인내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허공중에서 과거에 붙들린 채 현재와 미래를 살지 못했는지 나는 모른다. 하나라도 더 그들이 세상의 일원으로 마지막 날까지 당당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야 녀석들의 후예도 언젠가 이 땅에 태어나 새로운 생명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곧 땡볕과 불볕더위가 오리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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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님은 경북대 교수로, 민교협 경북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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