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익 열사는 좌파의 조직통합운동에서부터 이주여성운동까지 다양한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한편에서는 투철한 좌파 혁명가로 기억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 행정 관료들의 좋은 파트너로도 기억된다. 추모식에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하여 전북지역 내의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종교인들, 민주노총 전북본부의 소속 노동자들, 농민들, 사회단체 간부들, 이주여성들을 비롯한 가족과 지인 등 300여 명이 참가하였다.
문화제 형식으로 치러진 1기 추모제는 2006년 한 해 동안의 투쟁을 영상으로 제작하여 상영하였고, 조문익 열사가 남긴 글들을 편집한 유고집을 발간하여 반(反)자본주의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였다. 추모제 이름을 ‘민들레영토’라 정하고 행사를 진행하여, 조문익 열사의 사상과 생을 되새기며,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조문익 열사는 ‘행복한 운동론자’였다. 그는 극단적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행복한 운동론’을 전개하고 실행했다. 그의 ‘행복한 운동론’은 달리 표현하면 상식(常識), 비국가 공산주의, 영성의 마르크스주의이다. 그의 행복한 운동론은 상식적인 행복관을 제시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운동하는 존재였다. 그는 인간이 행복하려면 삶 자체인 운동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운동하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의 행복한 운동론에서 ‘운동론’은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의미하고, ‘행복한’은 비국가, 영성(靈性)을 의미한다. 그는 비국가 공산주의로 강령 없는 조직 활동을 실천했고, 여기서 과학 이데올로기와 조직 이데올로기 사이의 갈등을 체험했다. 그의 ‘공산주의’는 어느 경우에도 노동력 매매 없는 생산을 추구했고, 그의 ‘비국가’는 어느 경우에도 민주주의 문제, 연찬문제를 고민했다.
그는 영성의 활동가로서 모든 생령(生靈)들과의 상생(相生)를 추구했고, 여기서 연대 정신이 나왔다. 그의 ‘영성’은 어느 경우에도 협력자들(다른 조직, 종교인, 관료들 등)에게 이익만을 줄 뿐 손해는 끼치지 않는다는 조직론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이질적인 경향들, 다른 운동조직들, 종교인들, 각종 NGO들, 행정관료 등과 각자 수준에서 연대 가능한 그만큼 진심으로 소통했다. 그는 혁명가들에게 원칙에 투철한 혁명운동도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비혁명가 들에게는 혁명가가 공포의 대상이기는커녕 얼마나 따뜻한 이웃 시민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혁명을 외치지 않는 혁명가였고, 그는 공산주의를 외치는 않는 공산주의자였고, 그는 종교를 거론하지 않는 종교인이었다. 그는 연대의 풍토를 종교적 신앙처럼 중시하는 조직원칙을 확립하였고, 그것을 실천했다. 유고집에는 그의 사상적 근거인비국가 꼬뮨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운동적 노동운동과 운동가의 자세에 대해 성찰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또한 이주여성 운동이야기와 여러 편의 시들이 담겨져 있다.
조 열사는 1964년 전남 곡성 출생하여 고려대, 전북대 등에서 조직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87년 6.10. 민중대항쟁에서 전북지역 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민주노총 전북본부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를 교육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또한 노동, 사회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좌파조직통합에 앞장을 섰고, 한일민주노동자연대활동에 헌신하였다. 활동가 조직인 전북현장연대 운영위원장과 민중언론 참세상 창간을 제안하고 ,2005년부터장수논실마을학교에서 이주여성사업과 활동가 교육 사업에 온 몸을 던지다가 2006년 2월7일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명의 자식이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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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형 님은 조문익추모제준비위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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