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대중교통, 변증법적 커뮤니케이션"

[미디어공공성 대토론회](주제1발제) - 이영주미디어문화센터 부소장

23일 열린 ‘민주주의와 공영방송 그리고 미디어공공성’ 대토론회. 공영방송 구성원, 현업단체 전현직 간부, 언론단체 활동가 등이 자리를 함께 한 볼륨있는 토론 자리였다.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되는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의 실존, 그리고 미디어공공성 전략이라는 추상 수준이 높은 주제를 앞에 놓고, 토론 참가자들은 제각기 시선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이날 토론회는 공공미디어연구소,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신자유주의반대공영방송수호행동’,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하고, 경향신문과 민중언론참세상이 후원을 했다. 민중언론참세상은 토론회 생중계와 함께 토론회 참가자의 발제와 토론을 녹취하여 가급적 전문을 게재하기로 했다. 일부 참가자의 토론은 누락되었음을 밝히며, 옮기는 과정에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부분은 양해와 함께 덧글을 부탁드린다. 공영방송의 발전과 미디어공공성 전략 논의에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란다.
- [편집자 주]

  사진/ 김용욱 기자
여러분의 세미나에 대해 너무 과잉되지 않을까, 아니면 지금의 사건들을 누군가의 우려 대로 너무 낭만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할 거냐 이런 고민을 많이 하면서 쓴 글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최근 대중들의 움직임이 멋있다, 최고다, 완벽하다, 민주주의 급진과 확장을 가져올 거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아주 순수하게 언론학을 전공하고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최근 사건들을 냉정하게 돌아보며 제 경험 속에서 어떤 시각에서 녹여낼 거냐를 고민했고 비교의 관점을 택해 작성했다.

기존에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던 과정, 즉 정치적 여론 형성 및 제도정치권과 대중 사이를 매개했던 저널리즘의 형식들이 어떻게 도전받고 있는가. 최근에 어떤 도전이 형성되고 있는가, 이런 비교의 관점으로 차이를 고민했고, 매스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을 기존과 지금의 차이를 비교하며 검토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 민주주의 확장을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를 담아봤다.

한국 사회는 과두정인 국가이다. 과두정을 견제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의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인민이라는 말을 썼다. 대중, 다중, 시민 등의 표현을 쓰는데, 평소 무명 씨에 가까운 사람들을 염두에 두며 인민으로 썼다. 이 인민들이 최근 자기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시작했다는 말은 내가 누구이고, 내가 실질적으로 어떤 삶의 문제들을 안고 있고, 삶의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집단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자리를 만들게 된 배경에 이르기까지, 집단적 공감을 일궈내며 공통의 목적으로 합류되는 여러 가지 목소리를 다양하게 내며 이 지점까지 와있다. 이 힘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 같다.

촛불은 자기 이름 밝히기의 연쇄 물결이다. 그동안 국가에 의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었고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던 대다수 인민들이 정치적 주체화의 계기를 맞았다. 87년체제 이후에 인민들의 정치광장은 축소되어 왔었다. 정치적 과정에서 인민들의 배제 또한 심화되어왔다. 최근 광장정치, 거리의 정치의 부활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자신감 있게 새 정부를 출범시킨 권위주의 우파에게 큰 당혹감을 주고 있다. 새 정권 출범 이후 공직이랄지 사회 요직의 자립권을 활용해서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자기들의 헤게모니를 공고화하고자 했던 작업들, 학계나 언론계 중심으로 문화적 영역을 재구조화 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을 견고히 하고자 했던 노력들, 자기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쇠고기 문제로 인해서 이렇게 당혹스런 지점까지 오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확성기를 틀고 있다. 예전 새마을운동의 경험, 마을 이장 집에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새마을운동의 메시지, 믿어 달라 잘 하겠다는 한마디, 가까이 하지 못 했다는 정서적 한마디, 이런 한마디를 계속 앵무새처럼 틀어대며 확성기 정치를 하고 있다.

인민은 이런 확성기를 조롱한다. 신문과 방송, 온라인 매체, 인터넷 사이트, 그리고 와이브로를 쓰며 다매체 다채널 시대라고 이야기해왔던 미디어환경을 활용해내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미디어계나 정부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미디어가 인민의 무기로 쓰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우병 촛불운동 그리고 이 운동을 둘러싼 언론과 미디어의 영역, 특히 대중들의 표현의 영역을 보면서 세 가지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겠다. 정치적 측면, 문화적 측면, 생활적 측면에서 그동안 미디어가 생활세계 영향력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미디어 장 내부의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제기된다. 다음은 미디어와 대중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이고, 새 번째는 대중과 제도정치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등이다. 이를 둘러싸고 언론학과 문화연구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진/ 김용욱 기자

첫 번째 이야기는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어떤 대중적 정치적 광장의 확장, 미디어 공론장의 가능성이다. 이 논의는 첫 번째 아고라에 대한 검토부터, 한 사회의 정치적인 아르케(원리,원칙,출발점을 의미)를 소수 또는 개인이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념, 이것이 중요한데.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조건과 형식이 중요하다. 광장정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아르케의 다원주의, 그것이 국가체제 내부이든 글로벌 체제 안에서든, 참여할 수 있고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장을 통해서 국가의 영역이 사적 소유물에서 벗어나서 사회적인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정치적 가능성,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물론 광장에 존재한다고 해서 민주정부가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형식적인 조건이다. 광장이 흥미로운 것은 청중, 즉 듣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발화자라기보다는 청자가 중요하다. 정치적 의견을 밝히고자 하는 것도 청자가 있기 때문이고, 청자의 반응으로부터 자기 발언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발화자와 청자가 함께 모여 만들어지는 인식적인 광장, 광장이 정치의 독점이 아니라 이걸 제어하고 정치를 분점화 하고 다양한 정치의 가능성을 활성화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다.

아고라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최근 우리 사회 엘리트나 권력층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대중들의 정치적 광장, 인터넷을 매개하든, 광화문을 이야기하든, 그게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대중의 정치적 광장에 대한 불신이 많다는 거다. 정치적 판단은 사회에서 전문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즉 정치적 책임을 갖는 정부 관료들이나 제도정치인들 같은 사람들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대중들은 정치적 판단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철인왕을 요구하는 사람,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만 최근 촛불집회에서 미디어 상의 대중들의 움직임은 정치적인 철인왕을 부정하고 저항한다.

정치적 광장이 축소되어오고 동시에 사람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온 과정, 그 자리를 대체해온 것은 과두정이나 군주정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군주정에 가까운 대의제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대중들이 점점 더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윤리적 차원이나 종교적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위탁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존재했다.

한국 사회 대중의 삶 또한 이와 유사했다.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많은 부분 배제되고, 결국 개인적인 윤리의 차원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내세를 약속받고, 자기 개인의 행복 구원을 요청하고... 그런데 그게 축소된 아고라 광장의 정치의 개시는 근대의 소위 공론장의 형태였다. 우리 또한 근대 역사에서 대중들은 계급적 차이가 존재했고, 세대와 성의 차이들도 존재했다. 그래서 대중들의 공론장의 확장 속에서 정치와 시민사회 사이 영역들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근대의 근간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소수에게 독과점 되어있는 매스미디어가 아닌 대중의 참여가 가능한 공간이 인터넷이나 모바일 공간을 통해서 아고라적인 정치 문화가 활성화되었다. 정치적 야당의 형성, 대중들의 정치적 감각의 형성의 장으로서의 인터넷 아고라랄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잠재성을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 정치적 야당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정치적 의견들이 적절히 반영되지 못하고 억압, 차단 당했던 상황에서 대중들은 어떻게 정치적 의견들을 모아나갈 것인가, 관철할 것인가, 그런 정치적 관계 속에서 야당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의 확장은 예전에 비판적, 냉소적 시각 속에 접근했던 시각들을 고치는 계기가 되는데,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의 잠재성은 비판적인 언론학자나 문화연구자가 매스미디어나 상업화 된 전자미디어 영역에 대해 가진 냉소적인 시각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디어 장 내외부에서 어떤 긴장이 형성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중의 커뮤니케이션 양식, 교통 양식이 많은 부분 폄하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지배적인 언론양식, 지배집단의 언론양식이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에 의해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 지점이 뭐냐. 첫째, 그동안 매스미디어는 일방적인 말하기 매체었다. 쓰기와 말하기 이야기와 관련, 플라톤이 인간의 쓰기, 라이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도덕과 진리를 왜곡하는 측면과 인간의 기억력을 쇠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게 서구 사회 음성주의 구축의 철학적 배경이 아니었을까. 근데 왜 쓰기에 대해 두려워 했을까. 기록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했던 말이 기록되고 널리 알려지면서 비난받게 되고 공격받게 되고. 그러면서 이런 음성 중심주의를 내세우지 않았을까. 최근 인터넷에서 모바일 공간 속에서 대중들의 다양한 글쓰기,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음성주의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소통을 말하지만 그들의 소통은 전달, 공지, 명령, 요구, 강제, 협박, 위협이다. 이게 그들의 소통이다. 음성 중심적인, 로고스 중심적인 정치학이다. 이것에 맞서 비판하고, 일방적인 소통의 허무맹랑함과 사기성과 거짓을 밝혀내고, 그들 자신의 다양한 글쓰기를 해나가는 실천이 확장되고 있다는 거다.

또 하나는 멀티미디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기존 매스미디어가 곤혹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직접 촬영해서 보여주고, 직접 말을 하고. 짤방을 하고, 즉각적인 댓글을 단다. 멀티미디어의 복합적 양식이 전면화 되고 있다. 대중의 복합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기존에 머문 상태에서 지배적인 양식으로 존재할 것인가.

다음으로 수사술과 문화의 측면이다. 그동안 권력자, 관료, 사회적 엘리트들이 보여주었던 수사학을 이야기한다. 실질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 확성기를 통한 수사학이 넘쳐나고 있었고, TV, 뉴스, 신문 칼럼, 대통령의 담화문을 읽어보더라도 실질적인 내용은 없는, 수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공허한 수사들의 확장자들, 일방적인 소통의 주도자들이었는데 이게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음성 매체에 비해서 인쇄매체랄지 인터넷을 끊임없이 감시하려 하고 자유로운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형식과 내용을 견제, 억압하려는 형식이 있다. 정보통신윤리법이나 인터넷 사이드카 제도도 거론된다. 대중의 글쓰기를 진압하겠다, 대중의 목소리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수준 낮은 발상들이다. 자신들의 음성을 진리로 만들고 싶은 권력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리 순탄치 않을 것이다.

동시에 대중이 최근 보여주는 문학적 저널리즘의 양태들, 대중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과감없이 드러낸다. 수사화된 방식이 아니라 1인칭적인, 즉 나를 주어로 내세우고 내가 삶에서 어떤 문제점을 느끼고 있고, 내 삶의 진보를 위한 개선에서 무엇이 필요한 지를 표현한다. 이는 예전의 객관적 저널리즘, 3인칭 지향의 기존 저널리즘에 도전이 될 것이다. 1인칭 자기 서술에 대중들은 공감한다. 여기에 대해 기존의 보수적 시각들은 대중들의 저널리즘을 폄하한다. 익지 않았다. 성숙되지 않았다. 감정의 과잉이다 등등. 그런데 이런 걱정 안 하는 게 좋겠다. 광장이라고 설명했지만 대중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한 사람의 어떤 주장이 나오면 잘잘못 여부를 끊임없이 추적해 밝혀낸다. 아젠다가 이야기되고 있고 자기 주장의 근거가 내세워진다. 형식 측면에서 볼 때 대중들의 이러한 소통의 장이 매스미디어 장과 비교할 때 문제가 많은가. 덜 성숙한가. 감정 과잉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 스스로가 인터넷 공간과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자신들의 계몽적 공간을 만들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냐 무엇이 정부와 관료들이 거짓말 하는 것이냐,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이냐 추적하고 밝혀낸다. 누군가 전달하는 매세지의 수신자가 아니라, 직접 찾아내고 밝혀내고 토론하는 대중들의 공간이 확장되면서, 올바르고 진실된 것에 대한, 그리고 우리 삶의 지향에 대한 여러 차원의 계몽적인 것들이 형성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낭만주의 방식으로 최근의 사건을 읽지 말자고 했는데, 낭만주의와 함께 계중주의를 동시에 봐야하지 않겠는가.

최근 대중의 커뮤니케이션 형식은 내재적인, 변증법적인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띤다. 지금까지 매스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대중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들은 대부분 소외된 주체들이었다. 사회적인 엘리트들이나 지배계급은 대부분 노동을 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경험이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대중과의 교통에 취약하고 잘 이용하지도 않는다. 실재 대중과의 교통에 익숙하지 않고,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실질적인 삶의 경험, 삶의 현장,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지배적인 발화자들, 매스미디어의 주도자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소외된 형태의 커뮤네케이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자연스레 괴리될 수박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인터넷에서의 대중교통을 들여다보면 정말 자기 삶의 경험으로부터, 전체적인 삶의 현장으로부터 나오는 판단과 요구들이 제시되고 있다. 누가 더 진실된 이야기를 하는가, 누가 더 대안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나는 판단내리지 않겠다.

인터넷과 모바일 상황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넒은 대로의 중앙선, 한밤중에 중앙선 차로를 따라 놓여있는 촛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높은 빌딩에서 촬영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차에 내줘야 했던 도로가 인간에 의해 아름답게 전유될 수 있다는, 거리에 수많은 낙서들, 경찰의 방패에 쓰여진 낙서들은 얼마나 발랄한가. 굉장히 긴장되고 자칫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의 경계에 놓여있는 미적인 표현양식, 문학적 표현양식은 미적 운동으로 읽혀진다.

마지막으로, 소수를 중심으로 한 팔레오(Paleo) 저널리즘이 존재할 거냐의 문제다. 클래식하다는 뜻도 있고 오래되었다는 뜻도 있는데, 끊임없이 출현하는 다수의 아마추어 저널리즘에 의해서 이런 저널리즘이 앞으로 확장될 것이냐, 둘 간에 긴장이나 경쟁 관계가 더 확장될 것이냐, 분명한 건 소수 전문가라고 이야기됐던 팔레로 저널리즘에 맞선 아무추어 저널리즘의 큰 도전이 이루어질 것이란 점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우리 나라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저널리스트가 많구나. 신문사, 방송사에서 밝혀지지 않는 이야기들 진실들이 더 많구나를 느끼고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의 주도권은 누가 갖는 게 좋겠는가. 소수의 팔레오 저널리즘도 변화의 계기가 존재할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 이 자리가 자리인만큼 몇 가지가 토론되었으면 좋겠다. 이전부터 미디어, 문화운동을 하는 분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고민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 정치의 가능성을 발굴해내고 성숙한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이론들과 관점을 토론해보자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리버럴한,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 헤게모니 블록에서 굉장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일 수 있는 우파 헤게모니 블록으로의 권력 이동이 되었다.

미디어기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상업미디어에 비판적 시각을 취하고 있었는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입장만 취할 것인가, 관계적인 관점에서 미디어개혁을 함께 하는 운동적 지점을 찾을 것인가. 인터넷 공간 속에서 교통의 커뮤니케이션에 매몰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중들의 정치적 공간, 제도적인 공간을 어떻게 확장하고 안착화할 거냐를 고민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보수 상업 언론에 대해서는 이념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이들의 저널리즘의 abc를 문제 삼고 자질과 능력을 문제삼는 것, 이게 한참 떨어진다는 증거를 모아서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통해 맞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피직스(physics) 이후의 문제, 이를 뛰어넘는 문제에 많이 집중했는데, 삶의 질, 웰빙, 다문화주의 같은. 그러나 정치의 중심부는 피직스가 아닌가. 물리학이 아닌가. 식량, 물, 전기, 에너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는 전자 망, 전파 문제. 미디어기업의 소유 문제, 플랫폼 문제 이런 피직스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최종 도달점이랄까 가장 약한 고리를 위협에 빠뜨린다는 것. 그래서 미디어운동의 중심적인 테마로 피직스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확실성과 진실의 욕망이 여전히 필요하다. 다매체 다채널 자체가 성숙한 민주주의와 광장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기존의 저널리즘과 새롭게 출현하는 저널리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확실성과 신뢰 진실에 기초한 저널리즘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공영방송, 그리고 미디어공공성”대토론회

○ 제목 : “민주주의와 공영방송, 그리고 미디어공공성”대토론회
○ 주최 : 공공미디어연구소, 문화연대, 미디어행동 ‘신자유주의반대 공영방송 수호행동’, 프레시안
○ 주관 :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 후원 : 경향신문, 민중언론참세상
○ 시간 : 6월 23일 오후 2시 - 18시 30분
○ 장소 : 경향신문 대회의실

[1부] 촛불집회와 미디어, 민주주의(14:10 - 16: 10)
- 사회 : 원용진 (서강대 교수,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 발제 및 토론
1. 촛불집회의 대중문화, 매체정치(학)적 평가(14: 10 - 15: 20)
○발제 : 이영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연구소 책임 연구원, 미디어문화센터 부소장)
○토론 : 이주향 (수원대학교 교양교직 교수)
: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 프레시안 고정 칼럼니스트)
: 김현석 (KBS기자협회장, 미디어포커스 진행)
: 이기형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 2008년 6월 한국사회의 미디어공공성 위기현실 진단(15: 20 -16: 30)
○발제 :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시민환경정보센터소장)
○토론 : 정연우(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 강형철(숙명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재국(경향신문사 기자(정치부 차장))
: 현덕수 (YTN 노조위원장)

[2부] 공영방송 재민주화,재사회화 전략(라운드테이블)(16: 40 - 18: 30)
- 사회 :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 발제 및 토론
1. 공영방송 재민주화, 재사회화 전략(라운드테이블)
○발제 :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 부소장)
토론 :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 김승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 양승동 (한국PD연합회 회장)
: 정연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 최용익 (MBC논설위원, 새언론포럼 회장)
: 최상재 (전국언론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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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미디어공공성 , 미디어행동 , 공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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