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생물학과 생명의 정의 문제

지구 밖 생명을 찾는 맥락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이 질문은 과학적 탐구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사진: 앨런 피츠시먼스(Alan Fitzsimmons) / ESO 라 실라 천문대(La Silla Observatory)
<더 컨버세이션> 브라질(The Conversation Brasil)은 브라질 과학 대중화를 지원하는 기관이자 본 매체의 후원 기관 가운데 하나인 콘라두 베셀 재단(Fundação Conrado Wessel)FCW Cultura Científica와 정기적으로 협력해 기사를 게재한다. 이번 호는 생명을 우주적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학제간 과학인 우주생물학(Astrobiologia)을 주제로 다룬다. 이 글에서 철학자 주앙 코르테지(João Cortese)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생명의 정의가 부재한 문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논리적 도전, 그리고 우리가 단 하나의 생명 사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지구 밖 생명 탐색에 부과하는 한계를 논의한다.

철학자들은 정의를 제안하기를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시간에 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그러나 설명하려고 하면 더 이상 알지 못한다.”(고백록, XI, 14) 생명도 이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두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무엇이 생명을 정의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그 신비가 우리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은 매우 어렵고 적어도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우리가 의도하는 정의를 실제로 수립할 수 있는가? 둘째, 그러한 정의를 갖는 데 어떤 유용성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과학은 오늘날 생명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정의를 제안했다. 최근의 예를 하나 들면 NASA의 유명한 생명 정의가 있다. NASA는 생명을 다윈식 진화를 수행할 수 있는 자립적 화학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 한편, 양자역학의 주요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1943년에 생명을 열역학적 평형을 회피하는 시스템이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생화학자 대니얼 E. 코슐랜드 주니어(Daniel E. Koshland Jr.)2002Science에 발표한 고전적 논문 「생명의 일곱 기둥」(The Seven Pillars of Life)에서 생명의 특성을 나타내는 약어를 제안했다. 원래 영어 표현인 PICERAS는 프로그램화, 즉흥성, 구획화, 에너지, 재생, 적응성, 격리를 의미한다.

정의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앞서 언급한 어떤 정의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으며, 이 논의는 말 그대로 여전히 살아 있다. 생명의 정의를 적절하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흔히 그렇듯 부적절하다고 볼 것인가의 문제 외에도, 생명을 왜 정의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된다. 왜 그것을 정의해야 하는가?

생명 연구의 학문인 생물학은 오늘날 생명의 정의가 없이도 매우 잘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종(species)이 무엇인지, 혹은 생물학적 개체(individual)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는 실제적인 영향을 낳으며, 특히 과학에서 채택하는 모형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개체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는다면 생태학에서 개체군의 규모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또는 유전학과 진화 연구에서 서로 다른 세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생물과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생명의 정의가 실제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생명의 정의는 생명의 기원이나 지구 밖 생명의 존재 여부를 연구할 때 연구 방법론 자체를 수립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러한 주제들이 바로 우주생물학의 연구 영역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며, 과학적 탐구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지구 밖 생명을 찾으려면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비록 잠정적이고 도구적인 정의일지라도 그러한 정의가 없다면, 지구에서 생명의 기원을 나타내는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생명의 정의는 또한 생명을 발견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기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른 행성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은 이곳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미생물이 극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 연구하면 생물학이 지닌 놀라운 유연성을 드러낼 수 있다. 외계행성(exoplanet) 대기에서 생명지표(biosignature)를 찾으려는 노력은 생명의 화학과 비생물 물질의 화학을 구별하는 특성이 무엇인지 더욱 엄밀하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요구한다.

가능성과 한계

생물철학과 과학철학 연구자인 에밀리 파크(Emily Parke)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능적 정의와 물질적 정의를 구분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기능적 정의는 더 포괄적이며 복제, 번식, 변이와 같은 생명의 기능이나 과정을 강조한다. 반면 물질적 정의는 탄소 기반 생화학이나 핵산을 생명의 특징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물질적 정의는 더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복제를 담당하는 분자가 반드시 DNA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알고 있는 생명 형태에만 시야를 제한하게 된다.

반면 이러한 접근법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더 정확하게 알려 주므로 생명지표를 탐색할 때 유용할 수 있다. 기능적 정의의 장점은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두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명과 닮지 않은 형태의 생명까지 포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본질은 여전히 철학적 문제일 수 있다. T. S. 엘리엇(T. S. Eliot)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잃어버린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한편, 과학은 도구적 정의를 활용할 수 있다. 이는 탐구를 위한 실용적 도구로 사용하는 정의를 뜻한다.

이러한 정의는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최종적인 답을 내리려 하기보다, 특정 현상을 관찰하고 기술하며 비교하고 연구하는 데 유용한 기준을 마련하는 데 목적을 둔다. 따라서 그 가치는 철학적으로 논쟁을 종결하는 데 있지 않고, 과학이 질문을 체계화하고 가설을 검증하며 새로운 자료에 비추어 지속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도록 돕는 데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정의는 서로 다른 측면을 포착할 수 있으며, 이는 과학 연구에서 다원주의(pluralism)’를 채택할 수 있게 한다. 즉 하나 이상의 정의를 활용하고, 다루는 맥락과 문제에 따라 적절한 정의를 선택할 수 있다.

실천적·윤리적 측면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이며, 동물과 식물 그리고 수많은 다른 생명체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따라서 생명의 정의는 말 그대로 생사(生死)’의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점은 인간의 생명을 정의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둘러싼 논쟁적인 생명윤리 문제들은 이러한 정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적 사례를 들면 뇌사(brain death)’ 상태의 사람을 논의할 때, 신체가 여전히 일부 생물학적 활동을 유지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종료했다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단지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윤리적 가치를 지니는가? 예를 들어 세균과 돌을 대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른 윤리적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으며, 대부분 사람은 윤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명, 혹은 기껏해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감각능력을 지닌 생명체, 특히 동물의 생명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다양성 보전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 종의 개체 수 감소, 궁극적으로는 멸종은 단순한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생명 형태가 사라지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윤리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생물다양성은 그 자체로 윤리적 가치를 지니는가? 즉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갖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혜택 때문에 가치가 있는가? 즉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를 갖는가? 이는 또 다른 논쟁의 주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생명의 정의 자체가 이러한 논의를 지속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생물다양성과 생명체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멸종위기종, , 심지어 미생물조차 인간에게 어떤 유용성을 제공하는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반대로 식량, 의약품, 기후 안정화, 수분(受粉), 생태계 유지와 같은 혜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생물다양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도구적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이처럼 생명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다. 특히 바이러스, 합성 생물체, 나아가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과 같이 전통적인 정의에 도전하는 사례들을 마주할 때, 이 논의는 윤리적·철학적 차원까지 함께 포괄하게 된다.

[출처] Astrobiologia: por que a ciência considera necessário adotar mais de uma definição do que é vida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주앙 코르테지(João Cortese)는 상파울루대학교(Universidade de São Paulo, USP) 생명과학연구소(Instituto de Biociências) 철학 교수다. 과학 인식론(Epistemologia) 및 과학사(História da Ciência) 박사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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