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된 자본주의라는 키메라

출처: Chandan Siddaramaia, Unsplash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대체로 공통된 믿음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를 더 인간적이고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로 개혁할 수 있으며, 정치적 민주주의 아래 선거를 통해 획득한 국가 권력을 활용해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한 이렇게 개혁된 자본주의 상태를 영구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믿음의 이론적 토대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학이 제공했다. 케인스 자신도 케임브리지 학파의 개혁주의적 지적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케인스는 자신의 철학을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라고 불렀다. 여기서 (new)”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이유는 전통적 자유주의가 국가 개입의 부재를 주장한 것과 달리, 완전고용과 보다 평등한 소득 분배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전후 유럽에서는 여러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케인스주의 의제를 채택해 높은 고용 수준과 복지국가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이 추구한 목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후 실험이 시작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신자유주의가 유럽을 장악했다. 고용 확대를 위한 국가 지출은 재정적자나 부유층 증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해야 했는데, 금융자본의 반대로 인해 이를 지속할 수 없게 됐다. 또한 이미 도입한 복지국가 정책들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약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실업 증가에 대응해 전형적인 케인스주의 정책을 도입해 고용을 늘리려 했다. 그러나 고용은 늘지 않았고 금융자본은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프랑스 프랑화는 외환시장에서 가치가 하락했고, 미테랑은 결국 투자자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케인스주의 정책을 철회해야 했다. 이는 사실상 투기 세력을 달래기 위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었다. 국가가 자본주의를 개선하기 위해 개입하는 대신, 국가는 세계화된 금융자본의 포로가 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금융자본의 요구를 수행하게 됐다. “개혁된자본주의는 결국 키메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지식인들과 정치세력이 품었던 높은 기대를 배반했다.

그러나 통제된 자본주의라는 비전은 전후 선진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부르주아지(매판 부르주아지와 구별되는)가 상당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고, 반식민 전선의 일부를 구성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탈식민화 이후 수립된 경제정책 체제가 공공부문 주도의 사회주의 지향적발전 경로를 추구하면서도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발전 목표를 사회주의적 사회구조의 건설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경제가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남아 있는 자본주의 영역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동시에 통제 가능하기 때문에 최종 목표 달성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의 소득 불평등 수준은 지난 100년 가운데 어느 때보다 높고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한다. 더욱이 이러한 불평등 증가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추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독립 당시 전체 국민소득의 약 12%를 차지했던 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중은 1982년까지 6%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 비중은 2022~2322.6%까지 상승했다(이 수치는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를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통제된 자본주의, 그리고 함축적으로는 개혁된 자본주의라는 비전은 키메라로 드러났을까?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이 먼저 자발적 자본주의를 재확립한 이후 그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왜 중심부 국가들에서 그런 재확립이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의 본질 자체에 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절반만 이해했다. 그가 분명하게 파악한 것은 이 체제에서 개별 행위자들이 아무리 합리적계산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러한 결정들이 모여 반드시 합리적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이 체제는 무정부성을 내포하고 있다. 케인스는 이러한 무정부성을 인식했고, 국가가 개입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정부성은 자본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에는 착취적 성격 외에도 또 다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자생적이고 자기추동적인 체제라는 점이다. 개별 경제주체들은 경쟁의 압력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며, 개별 경제주체의 의지나 의식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체제 전체의 움직임은 일련의 자생적 경향에 의해 규정된다.

마르크스가 언급한 그러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자본 집중화 경향, 즉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거대한 자본 집단이 형성되는 경향이다. 그러나 자본의 내재적 경향 가운데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는 것은 자본이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제약을 극복하거나 우회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이 새로운 생산공정과 신제품을 끊임없이 도입하려는 경향과 정확히 유사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국가가 부과한 제약을 가장 먼저 돌파하는 자가 초과이윤을 얻기 때문에 그러한 동기가 발생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기술적으로 주어진 생산 제약을 가장 먼저 극복하는 자가 초과이윤을 얻기 때문에 그러한 동기가 발생한다.

물론 자본이 특정 시점에 국가가 부과한 제약을 항상 우회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 집중화가 진행되고 자본 규모가 커질수록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커진다. 더 큰 자본은 더 작은 자본보다 그러한 제약을 극복할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기 또는 여러 시기에 걸쳐 자본에 대한 제약이 실제로 작동하더라도, 오늘날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약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 집중화가 진행됨에 따라 결국 우회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통제된 자본주의가 영구적인 상태로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정 기간 통제가 유지되고 통제된 자본주의가 마치 고정된 상태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자본 집중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통제를 약화한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케인스주의의 약화는 정확히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일시적인 국제수지 지원이 필요했던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단기 자금을 유입받는 것을 편리하게 여겼다. 초기에는 이러한 단기 자금이 국가의 경제 개입 능력, 즉 높은 고용 수준과 복지 지출을 유지하려는 능력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 집중화가 진행되고 경제에 유입되는 단기 자금이 연기금과 같은 거대 자본 집단의 소유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이 자금을 회수할 경우 그 규모도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자금 유출을 막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게 됐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화된 금융자본이 승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다르게 말하면, 케인스주의가 전제했던 국민국가의 정책 자율성, 즉 사회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하는 정책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자율성은 처음에는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자율성은 잠식됐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성에 내재한 결과였다.

교과서가 설명하듯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부과된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그러한 제약을 극복하려 하며, 자본 집중화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그 능력이 더욱 커진다면, 개혁된 자본주의나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비전은 결국 키메라에 불과하다. 그러한 비전은 반드시 국가가 자본을 일정 수준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자본에 제약을 가하는 국가의 통제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무력화된다면, 그러한 비전은 당연히 지속될 수 없다.

바로 이 단순한 진실이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점점 더 신파시즘에 밀리는 이유의 근저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위기는 케인스주의의 약화에서 비롯된 이론적 위기가 정치 영역에서 표현된 결과다.

복지 자본주의가 키메라에 불과하다면 사회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소규모 자본주의 기업의 존재를 허용한다면, 더 거대한 자본 집단을 만들어내는 자본 집중화와 같은 자본의 내재적 경향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출처] The Chimera of A Reformed Capitalism | Peoples Democracy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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