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은 정체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처: Squids Z, Unsplash
나의 좋은 친구이자 공동 저자인 레이프 위너(Leif Wenar)는 첫 번째 트윗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친구들,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 본성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정하자. 가능한 최고의 세계를 상상해보라. 거기에 돈은 존재하는가?” 나는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돈부터 생각해보자. 돈의 핵심 기능은 무엇일까? 개인과 기업의 계획을 조정하고 자원을 ‘올바른’ 방향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내가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사려고 돈을 지불하면, 누군가는 나를 위해 커피를 만들어줄 것이고, 또 어떤 기업들은 커피 원두를 공급할 것이다. 모두가 내게서 돈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은 커피 재배자에서 최종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계획을 서로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에서 돈이 없다면 누가 이런 조정을 수행할까?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자. 나는 『고타 강령 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정의를 사용하겠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함께 생산력이 증대하고, 협동적 부의 모든 원천이 풍부하게 흐르는 상태이며, 그 결과 부르주아 권리의 협소한 지평을 완전히 넘어 사회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라는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재화와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풍부하고 희소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며, 우리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사회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당장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내가 동네 스타벅스에 갈 때 이미 나는 약간이나마 ‘유토피아의 해안’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을 보라. 그곳에서는 물, 얼음, 종이컵, 종이 냅킨, 꿀, 우유를 모두 무료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이 물품들은 모든 고객을 위해 비치돼 있으며, 심지어 고객이 아니고 잠시 들어온 사람도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 우리 생애 동안 거의 이런 풍요의 영역에 들어온 다른 재화들도 있다. 물과 전기가 그렇다. 노트북을 충전해야 할 때 나는 거의 모든 상점, 기차, 공항에서 무료 전기를 이용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물론 무료 박물관이나 야외 콘서트 같은 다른 서비스들도 있다. 다만 이 경우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미 비용을 지불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것들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따라서 이미 지금도 생산의 한계비용이 너무 낮아 사실상 무료에 가까운 재화와 서비스가 제한적이지만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평균 생산비용이 0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개별 소비자에게는 이러한 재화가 무료처럼 보인다). 이제 사람들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스타벅스에 가서 무료 종이 냅킨을 주머니에 가득 채우거나 얼음을 닥치는 대로 가져가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무료 야외 콘서트에 매일 가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가? 아니다. 이런 재화가 풍부하고 무료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과도하게 비축하지도 않고, 차지하려고 싸우지도 않는다. 필요할 때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유토피아적 재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재화들이 존재한다. 둘째, 사람들은 이러한 재화에 대해 사재기나 무분별한 파괴, 낭비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경제 발전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재화가 이러한 유토피아적 재화의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40~5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이나 종이 냅킨조차 돈을 내고 사야 했다. 지금처럼 무료로 제공받지 못했다 (이 점에서는 미국과 유럽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유럽의 스타벅스는 무료 종이 냅킨을 얻기 더 어렵다). 흙길 옆 여관에서 물 한 컵을 마시는 데조차 돈을 내야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언젠가 우리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원하는 만큼 무료 커피를 제공받게 될 수도 있다. 대신 새로운 환상적인 상품을 구매할 것이라는 기대가 전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커피는 종이 냅킨과 얼음처럼 우리의 유토피아적 재화 목록에 포함된다. 즉 그 목록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 상황을 먼 미래까지 연장해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수많은 재화가 결국 유토피아적 재화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누가 그것들을 생산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몇 시간을 일했는지를 보여주는 돈과 비슷한 쿠폰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쿠폰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재화가 어떤 양이든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쿠폰이 있든 없든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은 완전히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것이어야 하며, 어떤 형태로도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상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이 블로그를 무료로 쓰고 있다. 물론 나는 내 평판이 좋아지기를 바란다(혹은 망가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쓰기 때문에 내가 받게 되는 재화나 서비스는 단 하나도 없다. 여러분 역시 금전적 이유가 아니라 흥미 때문에 이 글을 읽는다. 많은 활동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료로 수행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지루하고 반복적이거나 힘든 일들 가운데 상당수는 로봇이 맡게 될 것이다. 로봇을 통제하는 데는 최소한의 노동만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로봇이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을 정하는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하는 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똑똑한 젊은이들이 그 일을 무료로 하기 위해 경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식당에 갔을 때 누가 음식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할까? 일부는 로봇이 맡고, 일부는 요리사나 서비스 제공자가 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맡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재화와 서비스의 질은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더 좋은 성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문제에 부딪히는 것 같다. 요리사의 수준이 다르므로 언제나 더 좋은 식당과 덜 좋은 식당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식당의 가격이 동일하게 0이라면, 더 좋은 식당과 덜 좋은 식당 사이에서 고객을 배분할 메커니즘은 대기 줄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재화와 서비스에는 부족 현상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족은 중앙계획경제에서처럼 줄서기를 통해 ‘해결’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노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아마도 일자리의 90%를 로봇으로 채우고, 9%는 단순히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들거나 불쾌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기계화할 수 없는 나머지 1%의 일자리는 언제나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 그 일을 하도록 유인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료인 상황에서 어떻게 유인할 수 있을까? 결국 특별한 쿠폰 형태를 띤 돈이 다시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현대판 스타하노프(Stakhanovites, 소련 생산영웅)들에게 식당에서 줄을 건너뛸 수 있는 쿠폰을 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무언가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돈이 암시하는 배분 메커니즘은 체제의 그 부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술 진보 문제를 생각해보자. 만약 기술 진보가 멈췄다고 가정한다면, 돈 없는 유토피아라는 발상은 궁극적으로,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거의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질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을 계속 발명하면서 기술 진보가 이어진다면, 처음에는 항상 희소한 이 새로운 재화들을 배분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배분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돈이나 준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정체된 경제에서는 무료이면서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재화의 범위와 무료로 수행되는 노동의 범위가 매우 커질 수 있다. 우리는 99%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 유토피아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반면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유토피아가 훨씬 비현실적이 된다. 우리가 더 빠르게 성장할수록 유토피아적 재화의 수는 늘어나고, 우리는 유토피아에 가까워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성장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새로운 재화를 더 많이 발명하게 되고, 그만큼 유토피아에서 더 멀어진다. 따라서 경제 발전의 근본적 성격은 레이프(Leif)의 질문 속에서 드러난다. 경제 발전은 우리를 날마다 더 부유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계속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완전한 행복은 정체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추신. 이 글은 내가 2015년 9월에 올린 웹포스트의 전문이다. 그러나 최근 J.W. 메이슨(J.W. Mason)과 함께 『화폐에 반대한다』(Against Money)를 출간한 친구 아르준 자야데브(Arjun Jayadev)와 토론하던 중 이 글이 다시 떠올랐고, 다시 게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 99 percent Utopia and money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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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