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의 언제나 영화처럼
삶은 영화를 꿈꾸고 영화 또한 삶을 꿈꿉니다. 푸른영상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장애와 여성과 가난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동창회

알엠 rmlist@jinbo.net / 2005년04월08일 13시12분

정확히 한 달 전, 나는 첫 칼럼을 쓰면서 ‘좀있다 저녁에 있을’ 동창회 걱정을 했다. 궁금해할 분들이 있을 것같아 그 얘기를 좀 해야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일이라는 게 진짜 이유이다.

동창회나 동문모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그 시절을 지내온 방식 때문이다. 전학 때문에 갑작스럽게 시작된 도시 생활을 나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생각했다. ‘이 공간은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이라면 미끄러지듯이 살아가면 되는 거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으며 3년을 보냈다. 대학시절은 좀 달랐지만 학교를 졸업하고나자 모든 관계들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한두 번 동기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재테크라든지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세상살이 얘기에 흥미보다는 단절을 더 많이 느꼈던 것같다. 자연스레 모든 관계들이 멀어져갔다.

한 달 전 나는 결심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인의 장막을 치고 그 속에서 세상으로 나갈 내 아이를 걱정하는 건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더 이상 자폐적으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연히 기회가 왔다.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정확히 21년만에 나는 기억 저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6시 저녁약속 전에 시간이 되는 친구들은 대학로에서 상영중인 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오후 3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극장 앞에 서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연락담당인 친구(다시 말하면 친구들의 연락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니 약속장소를 강남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이유를 묻는 내게 친구는 “강남이 중심이잖아. 강남에서는 어디든 가는 버스가 있거든” 하며 전혀 문제될 것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결국 광주에서 올라온 한 명의 친구만이 영화를 보았다. 약속이라는 게 항상 그렇듯 친구들은 3시 정각에 모일 수는 없었고 모두가 모인 후에는 상영시간 3시 50분까지 대학로로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주 친구와 영화를 보고 강남의 한 음식점에 도착하니 6시 30분, 나는 엄마한테 맡긴 아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한 시간 동안을 나는 온갖 감정이 뒤엉킨 채로 보냈다.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기는 친구들의 만들어내는 듯한 호탕함. 반면 스스로를 반대의 입장에 두고 있는 친구들의 묘한 쓸쓸함. 그래도 어느 한 구석에서 3시 강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침 일찍 대학로에서 내 영화를 보고 온 친구(그 친구의 엄마는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자살했다)와 나(나의 엄마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우리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것같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쉬움과 홀가분함과 그리고 아슬아슬함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자리에서 느꼈던 아슬아슬함이 나중에 어떻게 폭발했는지 친구의 전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자랑과 자기 과시를 하던 친구의 무신경한 말 한마디가 한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대판 싸운 두 친구는 지금까지 냉전 중이다. 친구들의 부탁으로 온라인에 국민학교 동창회 까페를 개설한 나 또한 구설수에 휘말려있다.

고두심 주연의 상업영화 <엄마>가 개봉한 이 때, 출신 국민학교가 다른 중학교 동창회장이(중학교 동창회가 썰렁해질 것을 우려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내 영화 <엄마…>의 관객동원을 위해 국민학교 까페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고 있다. 내 영화를 본다고 고두심 주연의 <엄마>를 예매했다는 얘기에 몇 번 웃기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게 사실이냐는 친구들의 친절한 문의를 통해서 음해의 내용을 알게 된 나는 처음엔 화가 났고 그 다음엔 한심해했고 지금은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대체 이런 일들까지 겪으면서 내가 동창회에 나가야하는가 한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구나’ 속단하고 멀어져버린 대학친구들이나, 졸업 이후에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들처럼 그냥 그렇게 고향친구들을 멀리 할 수가 없다. 이유가 뭘까? 한 달 동안 내내 생각했다. 이유가 뭘까, 하고.

내가 살던 마을은 좀 이상한 곳이었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 진도에 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릴 때 우리 마을은 그 차들이 잠깐 쉬어가는 곳이었다. 우리 마을을 지나면 곧 배를 타는 곳이 나왔고 그래서 관광객들의 차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운동장에서 쉬어갔다. 우리가 처음으로 접했던 외지인, 도시인은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까맣게 찌든 얼굴로 들일을 하던 우리들 부모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외지인들, 관광객들. 외지에 대한 선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아무개가 바람나서 밤봇짐을 쌌대더라, 하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고향 마을에선 '가출'을 '바람났다'고 표현했다. 도시를 동경하던 많은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밤이슬을 맞으며 서울로 떠났다. 어린 시절, 떠나간 언니 오빠들이 뭘 하는지를 어린 우리들은 몰랐다. 떠나간 언니들은 명절이 되면 하얗게 빛이 난 얼굴,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고향을 찾았다. 그렇게 서울은 우리들에게 꿈의 도시로 열망되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14살에 고향을 떠났다. 대학입학을 앞두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고향의 많은 언니, 오빠들처럼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간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애는 내게 커피를 사주었고,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고 아주 긴 자랑을 했다. 자기는 컴퓨터 자수 기술자라고, 이제 기계를 만진다고, 그렇게 자랑을 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몇 명의 애들이 있는데 자기가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주 많이 자랑을 했다.

고리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서 공장생활을 시작하고 명절이 되면 잘 차려입고서 고향을 방문하고. 어린 내가 서울을 동경했듯이 동생들은 또 내 친구들을 보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돌아온 언니들을 보며 우리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나는 운이 좋아서 그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난한 언니들과 엄마는 새벽잠을 설치며 청소를, 경리일을 했고 나는 그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 나와 컴퓨터 자수일을 하는 그 애의 자리는 우연히 바뀐 것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학생활 내내 나는 내가 엉뚱한 곳에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후, 돈암동 철거지역을 갔다. 갔다 와서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한 아이가 말했다.
“너무 놀랬다. 그 분들은 실밥을 따면 옷 하나당 10원을 주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엄마가 실밥따는 모습을 나는 중학교 때부터 보고 자라왔다. 가끔은 일을 돕기도 하면서 난 그렇게 살았다. 파업이 진행 중인 공장에 지지방문을 가서, 학교 축제 때면 열리는 연대주점에서,경찰의 침탈을 걱정하던 철거촌에서, 그렇게 만나는 얼굴들 속에서 나는 내 친구들을 떠올렸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때는 ‘민중’이라고 불렀던 수없이 많은 얼굴들에서 나는 내 친구들을 생각했고, 나와 너희들의 자리는 우연히, 정말 우연히 바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끝없이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그 시간들.

청량리 철거지역에서 맞았던 어느 겨울 아침이 생각난다. 침탈이 있을 거라는 소식에 같이 규찰을 섰던 한 남자. 나와 동갑이었지만 이미 아기아빠가 되어있던 그 남자. 무섭지 않다면서 자꾸 캡틴 큐를 홀짝이던 그 남자. 공장에 출근할 일을 걱정하던 그 남자. 굳센 의지나 강한 구호, 힘찬 몸짓과는 먼 그런 모습들. 가슴이 싸아해지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순간, 그럴 때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그렇게 힘겨울지도 모를 내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21년만에 현실에서 대면한 것이다. 자동차공업사를 한다는 친구의 손톱에 낀 기름때, 00군 상가번영회 재무부장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 우리 남편 빵빵하니까 걱정 말고 먹으라는 친구의 자랑. 그런 것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힘들게 살아왔겠구나. 서울 친구들에겐 당연한 고등학교 진학도, 우리들에겐 눈물로 따내야했던 목표들이었으니까. 내 고향 해남에선 그랬으니까.

싸움 소식을 들은 얼마 후, 나는 동창회 까페에 긴 글을 썼다가 지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올릴 것이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우리 남편은 월급이 100만원 정도다. 앞으로 동창회 모임이 있으면 회비를 내자. 잘사는 친구가 한 턱 내는 식으로 모임이 진행되면 나도 언젠가는 한 턱 내야하는 부담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구나 부담없이 회비를 내자. 그리고 우리들은 아주 예전에 친구였지만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서로 많이 달라져있으니까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사귀어보자……’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얼마 후 나는 실패했다고, 세상 나가기의 첫 걸음을 잘못 떼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동창회라는, 그 지연과 학연이 만들어낸 그릇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내 결심과는 하등 상관없는 물건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마음을 쓰고 싶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니다. 그 애들은 청산도, 정리도 못한 채 떠나왔던 내 20대의 어느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들에게 마음으로 가 닿고 싶다. 조금만 더 힘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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