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기]의 생각
언제나 탐구하고 앎에 이르며 뜻을 바로 세워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사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 세상을 해석만 하지 않고 실천으로 변혁하려는 사람, 사람을 생각하되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이것이 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대우교수로 사회과학 글쓰기와 유럽정치를 강의한다.

색깔혁명과 국가이익의 세계재편전략

정병기  / 2005년04월21일 14시48분

피를 흘리지 않고 시민혁명을 이룩한 것을 비유해 흔히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이라고 일컫는다.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혁명 이후 그 지도자였던 하벨(Vclav Havel)이 말한 데에서 유래하여, 이후 동유럽 대부분의 반공산주의 시민혁명에 적용된 말이다.

이제 벨벳 혁명은 소련의 해체 이후 성립된 독립국가연합(CIS)에서 일어나고 있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레몬 혁명’이 그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진영에서는 벨벳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선전해 왔다. 소련 붕괴 직후 동유럽을 휩쓴 민주화 도미노를 벨벳 혁명으로 찬양했듯이, 독립국가연합의 변화도 민중의 민주화 의지가 혁명의 원천임을 과시하고 치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에서 세계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이미 벨벳 혁명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 재편전략임을 통찰해 왔다. 그중 주목할 만한 입장은 ‘색깔 혁명’으로 통칭되는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의 잇따른 민중혁명이 러시아 변방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포석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영국 더 타임스의 저명한 논평가 사이먼 젠킨스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색깔 혁명을 “시어빠진 레몬”(Sour lemons)으로 비유한 바 있다.

그렇지만 세계 재편의 정치 전략 속에는 반드시 경제적 이익이 숨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세계전략 또한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독립국가연합국들의 색깔 혁명도 국제정치경제적 이익이 치열하게 각축하는 장에 다름 아니다.


색깔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독립국가연합국들의 지정학적 요인과 그것을 둘러싼 경제적 이익을 파악해야 한다. 이 국가들은 카스피 해를 둘러싼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카스피 해는 약 2천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특히 기존의 송유관뿐만 아니라 금년도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인 총 연장 1천 750킬로미터의 BTC 송유관이 문제의 핵심이다.

기존의 송유관은 카스피 해를 중심으로 북쪽 경로와 남쪽 경로로 나누어진다. 북쪽 경로는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하여 러시아를 거쳐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거치거나 러시아와 흑해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다. 남쪽 경로는 투르크메니스탄과 러시아 체첸 및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와 흑해를 거쳐 유럽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8년간의 논란 끝에 2002년 미국의 주도로 착공된 새로운 송유관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세이한까지 원유를 수송한다. 특히 이 새 송유관은 러시아 영토를 거치지 않고 카스피 해 원유를 공급하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유력 석유회사들도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색깔 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는 기존의 송유관과 밀접히 관련된 지역으로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적 이익이 러시아와 첨예하게 대립한 지역이다. 체첸 역시 이 송유관과 얽혀 있으며, 이것이 바로 러시아가 체첸을 독립시키지 않고 끝까지 장악하려는 이유가 된다.

반면 최근에 문제가 된 키르기스스탄은 카스피 해에서 떨어져 있어 송유관 문제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일부 비판적 견해도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으로만 해석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이러한 해석도 무시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도 새로운 송유관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송유관을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는 첨예하게 대립해 왔고, 그 대립은 급기야 무력시위로까지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키르기스스탄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키르키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약 3천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며, 아제리바이잔에서도 미군기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도 키르키스스탄의 칸트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파키스탄과 ‘테러 및 마약 소탕합동전’을 계획하고 타지키스탄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기지를 건설 중이다.

물론 키르기스 사태는 배경과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 때와 같이 외세 개입 흔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생각해 볼 때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거시적 안목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에서는 미국과 영국 등이 반정부세력에 막대한 자금과 선전선동 노하우를 지원했으며, 폴란드 등의 시민운동그룹이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반정부 시위를 이끄는 것도 서방의 개입과 같은 맥락이라는 지적도 분명히 존재한다. 새 송유관과 관련된 키르기스스탄의 중요성을 볼 때 이 나라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직접적인 개입이 아니라 평화적인 민중봉기와 같은 우회적 방법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옛 동유럽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립국가연합은 이른바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 이익에서도 러시아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지역이라 섣부른 군사적 개입이 몰고 올 파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이 국가들은 오랜 독재정치에 시달려 왔다는 공통점이 있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민주화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친미로 유도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존재한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급효과가 강한 색깔을 상징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부시 미대통령이 살육의 이라크전을 두고 “퍼플(보라색) 혁명”이라고 지칭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색은 눈을 첨예하게 자극하여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시각 현상에 약한 것이 사람이고 강력한 자극에 쉽게 반응하는 것이 또한 대중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역사의 왜곡으로 이어지기 쉽다. 강렬한 색 속에 숨은 암흑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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