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진]의 제국의 질서 바로보기
필자는 제국적 질서의 핵인 미국의 정치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 재직 중이며 동시에 미국 진보의 요람인 뉴스쿨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히틀러를 피해 뉴욕으로 망명한 유럽의 진보적 지성인 한나 아렌트와 같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미국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인보다 친미적인 한국인’ 담론의 숨겨진 함정

미국적 자유주의 내면화한 노무현 대통령

안병진  / 2005년05월01일 12시57분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에 대한 사고에서 미국의 시선을 내면화한 정부관리와 지식인들의 한계를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지극히 당연한 관습헌법처럼 수십 년간 작동해온 미국적 사고방식을 이제 정부의 수장이 비판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 사실 소위 IMF 위기 시절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는 눈부신 변화이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미국이 주도한 IMF 의 구조조정안에 대한 재협상론을 잠시 들먹였다가 사회 대부분의 세력으로부터 거의 역적 취급을 받은 바 있다. 반면에 이를 주도한 당시 현직 미국 대통령이던 클린턴은 가까운 측근에게 IMF의 구조조정안은 너무 가혹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 바 있다. 이것이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통쾌한 지적은 사회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다소 논리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다. 노대통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가 염두에 둔 미국인의 시선은 사실상 그의 생각처럼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이다. 복수의 시선들 중 두 가지 예만 들더라도 현재 미국은 부시로 상징되는 군사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 퇴행의 요소마저 있는 경향 대 클린턴으로 상징되는 시장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제국적 네트워크 지향의 경향이 서로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수렴한다.

바로 이점에서 위 노대통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듯이 국제관계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주도적 정치세력 내의 주요한 대립은 노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자주파 대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친미파의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적으로 거칠게 표현하면 부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한나라당 대 클린턴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대통령의 대립이다.

클린턴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지형을 한 단계 진전시킨 자유주의 개혁가이다. 현재 노대통령의 뜻과는 달리 왜곡되게 이해되고 있는 동북아 균형자론은 중국, 북한과의 적대적 갈등을 강조하는 부시에겐 부담이지만 세계를 네트워크적 제국으로 부드럽게 통합하고자하는 클린턴(집권 후반기부터 현재)에게는 아시아에서 연착륙할 수 있는 장기적 전략이다. 아울러 노대통령이 야심 있게 추구하는 동북아 평화공동체와 그 한국 내 하부구조로서 지역혁신전략은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네트워크 전략이라는 점에서 클린턴이 못다 이룬 꿈과 일치한다.

노대통령이 집착하는 것으로 알려진 균형자 개념은 노대통령이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들과 달리 얼마나 미국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였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노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의 국내판 버전은 스스로의 권력까지 헌납해가며 입법, 행정, 사법간의 균형과 견제 논리를 제도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는 한국 사회를 제왕주의에서 공화주의로 바꾸는 획기적 실험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대통령의 국내판 균형자론은 위에서 언급한 신자유주의적 동북아 네트워크론이 그러하듯이 클린턴이 추진했던 신자유주의적 노동, 교육, 의료 정책과 함께 가고 있다.

마치 국제관계에서 자주파 대 친미파의 대립이 허상이듯이 신자유주의라는 보수주의 정책에 노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기본적으로는 합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문제에서 주요 대립이 좌파 노대통령 대 우파 한나라당의 대립이라는 담론은 허구적이고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바로 이러한 국내외 문제에서의 뒤틀린 담론 지형에서 보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선이 절박하게 요구된다. 필자는 사실 노대통령 보다 더 친미적인 지식인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미국을 사랑하고 본인이 과거 유학했던 뉴욕에 대한 묘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본인이 말하는 ‘미국’ 또한 단수의 미국이 아니라 복수의 미국 중 그저 하나의 미국일 뿐이다. 본인이 수용한 미국은, 노대통령이 인상 깊게 받아들인 미국적 균형자론이 부시적 제국주의나 클린턴적 제국을 넘어 보다 민주적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미국이다. 지금 이 가능성은 아이러니하게 과거 늙은 구유럽으로 불리던 지역에서 오히려 더 꽃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또한 친유럽적이기도 하다.

과거 80년대 진보를 이끌었던 인사들은 지금 대거 청와대 및 각계각층에서 맹활약하며 한국 사회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마치 미국의 60년대 혁명이 지금의 강하고 혁신적인 미국을 만들었듯이 이들의 노력은 현재 현기증이 나도록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각성하고 그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이 지금 21세기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서 미국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노동 문제뿐 아니라 의료, 정치 개혁, 지역 혁신론, 대학 개혁론, 동북아론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뒤틀린 담론의 지형에서 ‘참세상’ 의 창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신문이 단지 공허한 반대나 일국내 목소리가 아니라 지구적이며 리눅스적인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기능하며 새로운 시선을 벼려내는 용광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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