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선진국이 뭐길래?

완군 ssamwan@jinbo.net / 2005년05월27일 17시11분

‘똥’을 쏟아내는 일보다 더 급박한 일은 없다.(여기서 방점은 ‘쏟아내다’이다.) 갑자기 ‘똥’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선, 이 글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쏟아내는’ 과정에서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화장실에서 멍하니 벽면을 응시하다 ‘비데 사용으로 위생 선진국을 만듭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대기업 광고의 불편함 때문이다. 개인의 위생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의 이데올로기란 것이 새삼 새로울 이유는 없지만, 왠지 ‘위생’과 ‘선진국’을 나란히 연계해놓은 교묘한 전개 방식에 심사가 뒤틀렸다. 도대체 ‘선진국’의 기준은 뭘까? 아주 어렸을적부터 귀가 닳도록 듣고 또 듣고있는 단어건만, 사실 뭐가 어떻게 작동하는 나라가 ‘선진국’인지 도무지 모르겠다.(작동의 수준을 논하는 ‘선진국’이라면 근본적으로 민중의 삶과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선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말아래 모든 것이 일단 멈춰버리는 파시즘의 작동 방식은 너무 끔찍하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연구 성과가 발표되면서 다시 한번 선진국 열망이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구분도 없다. 도대체 선진국이 뭐길래?

1. 전두환과 선진체육입국(先秦體育入國)

썩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꼬박 챙겨보는 편이다. ‘아, 정말 저런 걸 다 말하는구나’ 할 때도 물론(?) 있다.(그러나 우선 그 때 말하지 않았던 자들의 후일담 방송이 식상하며, 아직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전략이 걸린다. 더군다나 겨우 이제서야 말하면서도 틀리게 말하는 경우는 참기 어려운 난감함이다. 특히 화제를 모았던 ‘한국의 진보 3부작’ 같은 경우,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기획이었다.) 지난 22일 방송했던 ‘5공의 3S 정책’은 그닥 새로울건 없었지만, 전두환의 불가사의한 대중적 매력을 잘 포착한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선진체육입국(先秦體育入國)’, 방송에서는 전두환의 ‘통치철학’이란 표현을 썼지만, 내 생각에 그 단어는 그렇게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살인마인 전두환이, 그 희대의 파시스트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대중을 기만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생각해보면 전두환 개인의 성공(!)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12.12사태와 5월의 광주, 그 피비린내 진동하는 정권찬탈 쿠데타의 주인공인 전두환인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제5공화국’이 묘사처럼 전두환의 전략이 좋았다기보다는 모든 상황이 전두환에게만 호의적인,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상황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최근 논란이 되고있는 ‘제5공화국’의 전두환 미화 논란은 제작진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전두환 개인의 성공사를 쫒아가는 ‘기적의 환타지’를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의 성공은 역사의 실패이고 민중에게는 저주와 같은 일이었다.) ‘선진체육입국’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기묘한 조합이지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남성성을 기반으로 한 영웅주의, 결과 중심적 효율성 등 전두환이란 불쾌한 캐릭터와 80년대의 지배권력이 추구했던 모든 가치들을 ‘체육’이란 한 단어에 함축해낸다.

박정희의 전매특허처럼 이야기되는 ‘경제개발계획’과 전두환이 부르짖었던 ‘선진조국’은 모두 몰가치적 경제제일주의, 그 천박함 자체였으며 ‘승리’에 대한 유아적 열망의 다름아니다. ‘먹고 살아보자, 뭐라도 잘해보자, 그래서 이기자! 그러니까 그때까지 다들 입닥치고 참아라’

2. 황우석의 주문과 슬로건 사회 :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통한 선진과학입국

‘부족한 자원, 과학 기술을 연마만이 살 길이다.’, ‘미국에는 50년, 일본에는 30년 뒤져있다.’, ‘전국민의 과학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본적 있는 익숙한 구호이고 요즘도 들을 수 있는 주문이다. 늦은 근대화와 작은 나라 컴플렉스를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 동경으로 극복하려는 주술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 결과가 공개되면서 과학에 대한 맹목적 동경의 양상은 더욱 주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최근에 ‘언론’과 ‘여론’에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사람은 ‘히딩크 감독’ 정도 일 것이다. 황우석에 대한 찬사에는 수구/진보 구분이 없어졌으며, 야여, 여남, 소노 가릴 것이 없다. 그 핵심적 정서는 옛스럽게 그지없게도 ‘한민족의 자부심을 드높혔다’는 것이다. 젓가락질까지 황우석 찬양에 바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황우석에 대한 나아가 과학에 대한 맹목적 동경의 양상, 이것은 새로운 ‘파시즘’이다.

즉,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기존의 정치세력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상실하였을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해 파시즘이 등장한다.
- 파시즘 발생에 대한 정의, http://www.communnale.net/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개방론자들이 경제를 어찌해보고자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상황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있다. ‘IMF 극복’을 위한 개혁이란 이름으로 단행되었던 구조조정이 모두를 막다른 길로 내모는 살인적 상황이었음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 곧 좋아질거라던 경제지표들은 몇 개월의 ‘호황 예고’를 끝으로 다시 힘없이 가라앉고 있다. 경제는 ‘분배와 성장의 양날개’로 난다던 정권의 초기의 (립서비스성)호언장담마저 ‘경제 올인’이란 단어 뒤로 사라졌다.(‘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울산플랜트 노동자들은 오늘도 연행되고 있다.) 호기롭게 2만 달러를 외치고 있지만, 경제는 계속된 속앓이로 곪아터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와 다른 사회 분야간의 균형감을 사라지고 경제 안정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진공적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개발’과 ‘성장’의 파쇼적 경제정책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제정책은 근대화 과정의 가시적 산물을 통해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너무 많이 ‘개발’하고 ‘성장’해버린 나머지 90년대 이후 그 지위는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 그래서 등장한 용어가 IT, BT, ET 등등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확인할 길 역시 막막한 비가시적 조합들과 미디어 이벤트이다.

황우석 신드롬은 비가시적 조합과 미디어 이벤트의 결정판이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 발표를 둘러싼 한 편의 이 숭고하도록 처절한 ‘코미디’는 ‘선진과학입국’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슬로건 사회에는 전국가적 수준의 기만과 이벤트를 통한 심리적 위한 외에 어떠한 정책도 갖추고 있지 못한 진공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체육’을 통한 민족 자긍심 고취도 ‘복제배아 줄기세포’을 통한 과학 입국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선진국이 뭐길래? 오늘도 상상한다.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이 차라리 멈춰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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