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귀연]의 세상뒤집기
스스로 진지한 백수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문인으로 등단하였고,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과 문제점을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사진을 찍듯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속았다!

장귀연  / 2005년06월28일 9시29분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시대에 태어나,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을 보고 자랐거늘, 어느날 문득 둘러보니, 어머낫, 깜짝이야~, 출산이 애국이니, 애 낳으면 돈 준다니, 귀설고 낯설은 소리가 자자했다.

그동안 별로 주시하지 않았던지라 언제부터 반전이 되었는지 모르겠되, 나에게는 참으로 생소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 귀에 못 박히도록 주입받길, 애를 안 낳는 것이 애국자요 문화인이요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 대한가족계획협회 이름이 명토박힌 <둘만 낳아 잘 기르자!>와 <둘도 많다!>의 포스터는 눈 돌리는 곳마다 나부꼈다. 예비군 훈련에서 정관수술 공짜로 해준 데다 임신중절수술마저 권장사항이었고, 셋째 아이부터는 의료보험도 학자금 대출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굳게굳게 세뇌당한 정신에, 어느날 갑자기, 가족계획이 출산장려요 애 낳으면 돈 준다니, 좀 과장해서 말하면 천지가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거다.

“출산은 국력”, “저출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정부며 언론이며 떠들썩하고, 행간엔 여자들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난마저 암시되는 와중에, 애 안 낳은 여자인 나는, 허걱,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등국민이 된 듯한 느낌. 아, 내 한 몸의 이익만 생각해서 아이를 낳지 않다니,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인륜을 거스른 처사였나 보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아니, 애 낳지 말라고 세뇌시켜 놓고선, 이제 와서 애 안 낳는다고 나쁜 놈 만드는 건 뭔 짓이래?!

물론 저출산의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다시피 간단명료하다.
얼마전 동창들과 만났을 때 넷째 아이 출산예정중인 한 친구가 잠시 화제가 되었다. 미국에 원정출산하러 가 불참한 그 친구를 놓고 다들 감탄하는 목소리였다. “넷씩이나 낳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럽다.” “부잣집이잖니.” “유한계층 아니고서야 엄두를 내겠어? 돈도 돈이지만 맞벌이하려면 그럴 새도 없지.”
허엇, 이것도 격세지감. 나 어렸을 때, “둘 낳으면 문화인, 넷이면 야만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는데, 농담만은 아니었던 게 형제가 많은 집 아이는 ‘무식한(?) 집안’이라는 증거인 듯 기가 죽었었다. 이제, 자식 많은 건 부의 상징이다.

쉽게 원정출산하러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쉽게 자식을 낳지 않는다.(우연이겠지만, 그날 모인 동창들은 모두 아이가 없었다.) 2005년 가족계획협회의 새로운 포스터 <결혼후 1년내에 2명의 자녀를 30살 되기 전에 갖자>는 1·2·3운동을 따르면 <40대에 쪽박찬다>는 1·2·3·4운동으로 전화된다는 것을 모두들 영악하게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악함은 나라가 열심히 계몽한 결과이기도 하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신세 못 면한다>, 이거 바로 수십년 전 가족계획협회의 포스터다. 우리 세대, 어렸을 때부터 이 나랏말씀을 보고 듣고 가슴에 새겼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덮어놓고 많이 낳으란다. 한입으로 두말하기다. 그럴려면 거지신세 면할 대책이나 마련해주던가. 그런 것도 없으니, 어, 이거 한입으로 두말하기를 넘어, 사기 아냐?

그러고 보니, 수상타. 늙은 사람 먹여살릴 젊은 사람 필요하다는데, 청년실업은 넘쳐나고 사오정과 오륙도에 난리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대로, 먹여살리기는커녕 먹고살기도 힘들어하고 있다. 아니, 있는 사람의 입(人口)도 보장해주지 못하면서, 왠 인구감소 타령이람?!
지금 낳는 아이들이 클 수십년 후에는 일자리가 많아져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단 걸까? 별 그런 전망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만약 그렇다면 늘어난 수명만큼 나이든 사람들 일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나만 해도 오래오래 살고 싶고 오래오래 사회 속에서 활동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출산타령 인구타령 하고 있는 거 보니, 그때도 사오정 오륙도 쫓아낼 심산인가 보다. 그리고 젊고 싼 노동력 골라잡아 쓰려고?
애 낳아라 애 낳아라 부추켜서, 힘 안들이고 돈 안들이고 거저 먹겠단 심보인 모양이다. 한 마디로, 상대적 과잉인구 창출.

결혼 않고 애 안낳은 나에게, 어머니는 가끔 한탄하신다. “한창 때야 그게 편하지. 늙고 병들어 자식 없으면 어떡할래?”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아이참. 내가 늙을 때까지 우리나라 복지수준이 설마 이 수준이겠어? 노인들 활동이나 생활 편의가 충분해질 거고, 간병할 자식 없어도 안심하고 치료받을 시스템도 갖춰질 테고.”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제 이 말 못할 것 같다. 복지 시스템을 갖출 생각은 않고, 무조건 애만 낳으란다. 노인 부양이나 자식 양육은 여전히 가족에게 떠맡긴 채로 말이다.

그러니, 순전히 사기당한 기분. 애 안 낳아도, 아니, 안 낳으면, 잘 살 수 있다며?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잖아!
......속았다.
나랏말씀에 속은 게 어디 이 하나 뿐이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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