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의 언제나 영화처럼
삶은 영화를 꿈꾸고 영화 또한 삶을 꿈꿉니다. 푸른영상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장애와 여성과 가난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그가 남긴 선물

알엠 rmlist@jinbo.net / 2005년07월14일 14시15분

며칠 전, 아이들을 재우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얼른 전화를 받아들고서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는데 낯선 경상도 말씨가 들렸다.

“저 예전에 만났죠. 김형율이 애비입니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고 쉼없이 다짐하지만 벌써 절반이 지나간 2005년, 올해에도 후회되는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뼈아프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은 김형율씨와의 일이다. 빛나는 5월의 어느 날, 모처럼만의 가족외출로 들떠있던 아침에 사무실 선배가 김형율씨의 죽음을 전해 주었다. 너무 뜻밖이라 놀랬고 곧이어 나는 평생을 지고 갈 빚을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하게도 그랬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픔보다 부채감을 먼저 느끼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솔직히 그랬다.
‘아, 나는 이제 이 짐을 평생 지고 가야겠구나…’

2004년 8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장애전문잡지 ‘함께걸음’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 기사의 본문까지 인용한 길고 긴 편지였다.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환우들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장애우인권으로 영상다큐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두가지였다. 장애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엄마…>라는 영화를 만든 아기 엄마라는 점. 김형율씨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장애인권의 문제로, 그리고 엄마의 입장에서 만들어주기를 바랬다. 편지를 받고 아기가 너무 어려서 작업하기는 힘들 것같다는 답장을 보낸 얼마 후, 그는 푸른영상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의 둘째아기 한별이는 그 때 6개월이었고 그는 자주 한별이를 보며 웃었다. 원폭2세환우회라는 조직의 이름도 낯설었지만 원폭이라는 단어는 말하자면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잠깐 떠올리는, 나와는 먼 역사책 속의 단어였다. 그런데… 김형율씨는 나랑 동년배였다. 생후 20일부터 집보다는 병원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던 그가 나의 아기를 보며 “한별아, 한별아” 미소 지을 때, 일과 아이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처지는 말할 거리도 못된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사는 게 줄다리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를 가운데에 두고 일과 아기가 양쪽에서 팔을 잡아 끌고 있다는 상상. 김형율씨를 만나고 며칠동안 고민했다. 영아 전문 어린이집에 한별이를 맡길까? 내가 처음 다큐멘터리에 입문했을 때,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언제까지 나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는 결국, 아기 편으로 걸어갔다.

‘김형율씨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지만 한별이의 엄마는 나 뿐인걸. 내 인생의 스케줄대로 움직이자. 더 이상 하은이 때와 같은 후회를 하지 말자’
사무실 선배에게 작업을 부탁했고 몇 번 만나기도 했지만 작업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했다. 김형율씨가 나를 지목하며 “꼭 당신이 해야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불편했다. 사무실 선배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글을 참 오래도 쓴다. 일주일 전에 시작한 글은 몇 줄 나가지 못하고 멈추곤 했다. 김형율씨의 죽음을 전해준 사람은 사무실 선배였다. 선배 또한 깊게 가라앉은 무거운 목소리로 우울함을 전해왔고 우리는 같이 미안해하고 또 같이 죄스러워했다. 선배는 부산의 빈소까지 내려갔다 왔지만 나는 가지 못했다. 아기를 업고 무리해서 갈 수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내 안의 소리가 있었다.
‘그래, 살아서는 그렇게 무심해놓고 이제 세상 떠난 다음에 가겠단 말이냐? 마음의 짐을 덜으려고? 너무 얄팍한 마음 아니냐?’

조의금을 부치면서도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한 달에 한 번 글을 쓰는 미디어참세상.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게 전부인 내게는 특별한 꺼리가 없다. 한 달 동안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지배했던 일을 쓰곤 하였지만, 그리하여 이번 달에는 김형율씨의 일을 쓰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주 막혔다. 힘이 들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정말 얄팍하지. 우연히 ‘함께 걸음’의 기자를 만났고 애초의 인연도 있고 해서 김형율씨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유품을 정리하다 전화를 하셔서 생전에 김형율씨의 소원이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이었다는 김형율씨 아버님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기자가 말했다.
“김형율씨한테 미안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기자 또한 원폭2세환우들의 생애사 작업을 부탁받았다고 한다. 나처럼 후회하고 나처럼 미안해하고 나처럼 가슴아파하는 사람이 다양한 영역에 다양한 내용으로 포진해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마음 한 쪽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김형율씨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그가 부탁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작업의 원동력은 이제 그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다. 그의 유일한 씨앗을 오직 나만이 건네받은 것은 아니었다. “60년을 매장당해온 역사를 3년 만에 밝은 곳으로 끌어내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거라는 건강세상네트워크대표 강주성씨의 말처럼 그는 지난 3년간 약한 폐로 온 땅을 누비며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하나를 건네받았다. 나만이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어쩔 수 없이 시작했을지도 모를 그 일을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가 내게 선물을 주었다. 일과 아이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엄마의 시선으로 봐달라고. 지금의 시간을 나는 잘 겪어야겠다.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어서 두 아이와 매일매일을 비슷하게 보내고 있지만 이 시간이 내게 훌륭한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토요일, 그러니까 7월 16일 7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는 ‘원폭피해자2세 고 김형율 49재 추모제’가 열린다. 당신도 그의 씨앗을 건네 받을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씨앗을 키워가면 될 것같다. 나는 엄마로서, 기록영화 연출자로서 내 선 자리에서 그 씨앗을 키워나갈 것이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며 평화를 말하던 김형율씨의 씨앗을 나는 소중히 키워나가고 싶다.
참새회원이라면 누구나 참세상 편집국이 생산한 모든 콘텐츠에 태그를 달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단어, 또는 내용중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서 붙여주세요.
태그:
태그를 한개 입력할 때마다 엔터키를 누르면 새로운 입력창이 나옵니다.

관련사이트

서울-히로시마 평화의 종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