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섶]의 왼손 놀이
문화는 민중의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필자는 문화이론가이면서, 부안의 주민으로서 반핵투쟁에 결합하여 지역 공동체의 역동적인 문화에 대해서 눈시울 뜨거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문화와 생활이 어우러진 우리의 삶 속에서 진보의 방향을 고민해 본다.

논술을 두려워 하는가

고길섶  / 2005년07월19일 13시42분

나는 수년 전에 논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논술을 잘 들여다보면, 논술이 교육혁명의 중요한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사교육비’ 운운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그리고 대학입시로서의 논술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학교 교사들도 있으나 입시과목이 아니면 쳐다도 안보는 교육체제에서 역설적으로 입시과목이기 때문에 논술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 교육시장에서 독서·글쓰기·논술 교육이 커진 것은 대입논술 효과 때문이다.

나는 교육이 입시를 향해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교육의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신자유주의 노동자기계로 ‘인적자원화’하는 교육정책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다양한 교육방법이 존재해야 하며, 탈입시 공교육이나 대안교육의 실험들이 시도되어야 한다. 논술교육은 꼭 입시를 위해서만도 존재할 수는 없고, 그 자체 글쓰기 교육으로서 대안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적 존재방식이 대학입시를 위해서 기능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점에서는 입시를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있다. 본고사형 논술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한에서 말이다.

최근 서울대 논술 때문에 논술에 대해 말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본고사 논술이라는 게 대체로 진보 교육운동 진영의 판단이며, ‘본고사 부활’을 저지하려는 태세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과도 한판 붙어보자는 서울대 총장이 어떤 사람이고 교육철학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하고, 2008학년도 이후 논술고사가 어떻게 출제되는지를 놓고 판가름해야 한다. 조만간 예시문제가 선보인다고 하니 그때 판단해도 될 일이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과거 ‘어린왕자’ 식의 출제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발언을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출제된 문제를 확인해보았다. 서울대 총장이 왜 문제였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판단하기로도 좋은 문제 유형이 아니다. 출제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거대한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 대부분이 익명의 존재로 방치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음 글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참다운 정서적 유대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어떠한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간략히 밝히고, 둘째, 그러한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볼 때 참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이 글에서 암시하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이 어떠한 의의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제시문 생략)

몇 년 전 펴낸 논술 지침서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 문제가 “주어진 제시문의 내용을 설문에서 미리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참다운 정서적 유대관계의 형성의 중요성’이라고 단정해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제시문에 대한 출제자의 해석이 이미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제시문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데 말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논술문제로서 실패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암기논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어린 왕자’는 주제가 뭐고 ‘동물농장’은 주제가 뭐고, 하는 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출제된 제시문(고전)을 읽어본 사람이 유리하게 된다. 그렇다고 수험생들이 그 많은 고전들을 어떻게 다 읽어보나. 요약본이나 주제들만을 대략 암기할 수밖에. 그러나 논술 문제는 책의 전체 주제와는 무관해야 한다. 제시된 부분만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독해력과 주어진 논제와 연관해서 기술할 수 있는 판단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때로 제시된 부분은 전체 글과 모순될 수도 있으므로 제시문 내부의 문제설정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창조적인 논술(=지식) 생산의 측정방법일 터다. 어쩌면 정운찬 총장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논술교육에는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참여해왔다. 수년 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도 깊이 관여하여 논술 참고서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논술 참고서들이 내용적으로는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데 반해 글쓰기의 형식에서는 기존의 낡은 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었다고 본다.

논술은 사유의 자유로운 흐름을 흐르게 하는 것인데, 가령,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에서 이미 사유의 흐름이 막혀버리도록 하여 억압자로 작용한 것이다. 내가 논술이 교육혁명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글 내용에서 진보성을 담지하는 것(또다른 암기!)보다 더 중요하게 글 형식의 새로운 실험성을 담보해낼 수 있을 때를 말한다.

표현형식의 자유!, 그것은 내용형식의 자유를 더 활짝 열어놓는다. 표현형식의 자유라 함은 가령, 문투를 저렇게 쓰면 안 되고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표현형식의 다양성에 따르는 다양한 글의 효과를 서로 비교해보고 논술자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논술을 지도하는 학교 교사들도 학원 강사들도 대부분은 표현형식의 낡은 구조(서론-본론-결론식 글쓰기 등)에 이미 젖어버렸다. 교사/강사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뛰어넘지 못하고 기존 낡은 방법에 맞추려 하다보니 논술은 다시 갇혀지게 된다. 그들만이 아니라 대다수 출제교수들도 갇혀 있다. 그러다보니 ‘어린 왕자’와 같은 출제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논술이 교육혁명이려면 가르치거나 평가하는 그 주체집단이 먼저 변해야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교과과정 내로 한정짓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학교지식 바깥의 지식들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교사들도 문제다. 교과서 지식에 갇혀지고자 할 때 학교/교육은 계속 죽는다. 또한 ‘출제의도’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한심한 태도는 논술을 그야말로 입시과목으로 전락시키며 자기주체적인 논술의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

학교교육이 입시방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논술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해진다. 물론 논술 하나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도 우습지만 ‘통합교과’의 효과를 가진 논술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본고사 부활이 아닌 다음에야 논술고사를 옹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서울대 논술도 예시문제가 제시될 때까지 기다려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교육제도의 개혁도 필요한 일이지만 교육과정의 패러다임 전환도 매우 필요하다. 문화교육과 함께 논술교육은 교육과정의 패러다임 전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잠 담그는 일만 보고 본고사 부활이라 외치는 것은 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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