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의 언제나 영화처럼
삶은 영화를 꿈꾸고 영화 또한 삶을 꿈꿉니다. 푸른영상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장애와 여성과 가난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촛불론 혹은 쌈마이론

알엠 rmlist@jinbo.net / 2005년08월12일 4시29분

나는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한다. 내가 하는 영상작업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은 돈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나와 동료들은 돈 되는 일을 꼭 해야만 한다. 기업체의 홍보영상물(극히 드문 경우이긴 하다)이나 운동단체의 행사영상물을 만들어서 받은 돈으로 우리들은 테잎도 사고 식비나 사무실 임대료를 낸다.

10년지기 친구같은 단체가 있었다. 푸른영상과 그 단체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다. 가끔씩 그 단체에서 행사영상을 부탁하면 우리들은 최소한의 경비만 받고서 열심히 만들어왔다. 몇 년 전, 그 단체는 10주년을 맞았다. 10주년을 기념하여 크게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들은 당연히 행사영상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정을 비워두고 있었다. 행사는 가까워져 오는데 소식이 없어서 연락을 해보니 담당자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이번 행사에 쓰일 영상물은 좀 특별해서 다른 데에다가 맡겼습니다. 저희가 필요로 하는 영상 스타일과 푸른영상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같아서요.”

알았다고 전화를 끊으며 200%의 진실을 파악했다. 순서도가 그려진다. 영상물에 돈 좀 쓰겠다는 것이고 비싸게 줄 수 있는 조건이면 좀 더 나은(?) 제작사에게 맡기고 싶다는 거겠지. 씁쓸했지만 그 쪽에서 생각하는 우리의 위상이 그만큼이라면 한 번 쿨하게 웃어주고 잊어버리자, 하고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불쾌감은 오래갔다. 솔직히 말해서 배신감이 느껴졌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는 멀티플레이어라구요. 영상물은 돈 들인만큼 나와요. 조명 치고 비싼 카메라로 촬영하고 비싼 편집실 빌려서 화려한 테크닉으로 떡칠할 수 있으면, 그만큼의 돈 있으면 우리도 삐까번쩍하게 할 수 있죠. 하지만 아무리 비싼 데를 만나도 우리만큼 소프트웨어가 충실하진 못할걸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궁시렁거리면서 말이다.

‘촛불론’이라는 말이 있다. 칠흑같은 어둠 속의 촛불 하나는 소중하다. 하지만 밝은 형광등 아래 촛불은, 그 촛불의 빛은 의미가 없다. 친구가 내게 그 단어를 알려주던 시기에 TV에서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는 김종서, 한영애 등 대중가수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었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말해지고 진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정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그 시기. 한 편에서는 “가벼우면 좋고, 깃털처럼 가벼우면 더욱 좋다고 떠받들어진 90년대는 80년대의 무거움과 80년대의 경직성을 마음껏 조롱(방현석, ‘당신의 왼편’)”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 시기를 회고해보면 없던 길을 내며 싸워왔던 자들이 설 자리를 못 찾고 주춤대고 있었던 것같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 정말 미안하지만 내 자리가 거기였기 때문에 나는 그 시기를 그렇게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요즘 ‘촛불론’을 말하고 떠난 그 친구의 이름을 가끔 TV에서 본다. 재벌 2세의 사랑이야기나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암투 등을 펼쳐놓는 그 드라마들은 친구에 대한 오래 전 기억과 엇갈린다.
‘그래, 너는 촛불이기를 포기하고 샹들리에가 되었구나’
빛이 넘쳐나는 장소에서 외양을 신경써야 하는 샹들리에. 너는 그렇게 부잣집 거실을 장식하고 있구나, 하는 뭐 그런 생각. 그런데 샹들리에가 촛불보고 “너 왜 그렇게 초라하니?‘라고 말하는 건 좀 웃긴다.

각 방송사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한국사회를 말한다>를 제작하며 우리 사회의 개혁과제를 제시하고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모습들은 의미있다. 또는 인터뷰만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가족>, 역시 내레이션이 없었던 <출가>와 같은 다큐들은 방송다큐가 형식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들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초의 ~’라든지 ‘첫번째~’와 같은 광고문구는 제발 앞에다가 ‘방송다큐로서’와 같은 수식어를 붙였으면 좋겠다. 너무 쪼잔한 시비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간 방송사PD들이 독립다큐인들과의 만남에서 보여줬던 오만한 태도를 생각해보면 저런 식의 홍보문구는 목적의식이 분명하다. 다큐에 대해 무지하거나, 독립다큐를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포럼 <독립다큐멘터리와 방송채널과의 연계교류방안>에서 한 KBS PD는 “'독립다큐'의 존재자체를 무시하거나 무지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KBS내에도 70~80명의 다큐PD들이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다큐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KBS 내부에서는 별로 독립 다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고 같은 해 열렸던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 <P.O.V 사례로 본 독립다큐멘터리와 공영방송>에 참가했던 MBC PD는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프로그램은 의미가 없다“는 요지의 말을 하며 독립다큐의 존재의미를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주 부탁을 해온다. 도시빈민들의 철거투쟁, 국가보안법의 희생양, 양심수들의 사연……. 10여 년 전에는 결코 그들의 관심분야가 아니었던, 아니 다룰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야기들. ‘주류미디어로부터 소외받은 인권’으로 분류되는, 나의 선배들이 같이 피흘리고 같이 잡혀가며 카메라에 담았던 그 영상물들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국내 최초’라든지 ‘첫번째 시도’와 같은 수식어가 필요하면 다 가져가라. 어차피 나는, 우리들은 그런 식의 표딱지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들의 모든 영화는 항상 ‘최초의’ 어떤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기획할 때 체크리스트의 우선 순위에는 ‘세상에 없는 나만의 시선’이라는 항목이 자리잡고 있다. 다루지 않은 소재와 영역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루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 의미이다. 나의 선배들은 그리고 동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왔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우리들은 촛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진 길 위를 편안하게 걸어오면서 혹시나 당신들이 닦고 있는 길과 비교하지 말아 달라. 당신들과 우리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비교불가능한 존재니까.

글을 쓰다 보니 역시 나는 쪼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에 자존심 상해하고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료들은 그저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와 같은 태도로 의연하게 살아갈 뿐이다. 이런 식의 차이는 10년지기 친구같은 단체의 뒷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때보다 비싼 돈을 주고 다른 제작사에 맡겼던 영상물이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행사 일주일을 앞두고 그분들은 우리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나는 안하고 싶었고 다른 동료들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나빠서 싫다’고 말한 나와는 약간 다른 입장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부탁하는 사람들은 그저 그동안 만들었던 영상물을 짜깁기하는 수준으로라도 만들어달라고 했지만, 동료들은 그렇게는 일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영상은 그들이 우리에게 붙였을 ‘쌈마이’라는 표딱지에 딱 맞는 수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악순환은 계속될 것인데 그냥 여기서 그 고리를 끊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 일을 맡았다. 기분이나 표딱지에 연연해하지 않는, 지역운동의 대의를 생각하는 선배의 마음 때문이었다.

사무실 선배와 함께 그 일을 맡았다. 일주일동안 우리들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일단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한다는 게 우리들 원칙이고, 개인적으로는 쌈마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행사는 성공적이었고 영상물이 상영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은 감동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고(^^) 내가 울었던 이유는 무대감독의 착오로 영상물의 에필로그가 짤려 버렸기 때문이다. 보통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힘을 많이 주는데 멍청한 무대감독이 에필로그 전에 잠깐 들어가는 블랙자막을 끝이라고 착각한 채 영상물을 끊어버린 것이다. 눈물 속에서 그렇게 그 일은 끝이 났다.

며칠 전, 우리는 비슷한 일을 또 겪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자주 겪을 것이다. 뭐 우린 쌈마이니까. 촛불이니까. 당신들이 영상물을 의뢰할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는 걸을 기뻐해주고 싶다. 오히려 나는 영원히 촛불이고 싶다. 샹들리에가 되어 부자집 호사가의 취미거리로 전락하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다. 약하더라도 나만의 빛을 내고 싶다. 스스로의 빛에 도취되어 비틀거리지 않는, 단 한사람에게라도 길잡이가 되는 그런 빛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 꿈이다.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쌈마이 취급 받는 것에 대해서 의연해지고 싶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의연하게 나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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