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축구, 근대를 넘어서는가?

근대적 ‘구조’에 자본에 의해 최첨단 ‘기술’ 이식

완군 ssamwan@jinbo.net / 2005년09월14일 18시04분

어찌되었건 ‘본프레레’ 감독은 떠났다. "They are Professional(그들은 프로이다)“를 달고 살았다던 유럽의 합리주의자는 결국 여론의 뭇매에 짜증이 난 제왕의 한 마디에 바람처럼 날아갔다. ‘자진사퇴’ 전날까지도 ‘목표가 있기에 포기할 수 없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 하룻밤만에 ‘자진사퇴’ 당하였다.(‘본프레레’ 감독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엇갈리므로 일단 생략하겠다.)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 활동가로서 조금 덜 알려진 정보까지 본의 아니게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본프레레’ 감독이 즐기던 말중의 하나가 ”그들은 프로이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강도높은 훈련과 엄격한 생활 통제를 요구했던 축구협회 관계자들게는 그야말로 ‘청천벼락, 날벼락’ 같은 소리였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하여간 그 한마디에 여럿 머쓱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축구협회 이 반응 왠지 익숙하고 다행(?)스럽기까지 하지 않은가?


문화연대에서 ‘대한축구협회 개혁’을 외쳤을때, 가장 흔했던 반응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며 ‘역시, (뭐하는 곳인지 알수가 없지만)문화연대는 (시덥지 않아보이지만)재미난 일 하네요’ 였다. 맞다. 재밌다. 그것은 ‘대마초’가 인권의 문제라고 주장했을때도 그랬고, ‘문신’이야말로 자기실천적 예술이라는 주장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구’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며 사사건건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시․공간이다. 정몽준이라는 전근대적 ‘군주’와 규율과 통제를 통해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근대적인 ‘훈련’ 방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꺼이 밤잠을 포기하며 유럽리그의 문자중계를 기다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개인’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매력적인 텍스트가 바로 ‘축구’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가지 목줄이 있는데, 학연, 지연, 혈연 등등 종류의 다양함을 이루 말하기 어렵다. 외국 감독을 영입하는 이유는 최소한 그들은 ‘목줄’에는 메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목줄’에 메여있는 것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한다는 착각 아닌 착각은 한 번 ‘목줄’에 메인 순간부터 자신이 상실될 때까지 ‘목줄’에 영원히 충성을 바치는 절대 근거가 된다. ‘목줄’의 또 한가지 특징은 윤리와 정의를 아주 쉽게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목줄’은 윤리와 정의를 망각하고 거대 체계와 그 지배 질서에 몰가치적이고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태도를 당연시하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깨부숴야 할 근대의 유산이고 근대가 개인을 피폐하게 만든 이데올로기 장치의 핵심이다.

외국 감독들은 능력의 여부와 떠나 최소한 ‘목줄’의 질곡에서 자유롭다. 내부의 누구도 ‘목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학교와 군대, 스포츠가 특히 더 그러하다.) 그것이 외국 감독을 뽑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짜 아이러니는 여기서 부터이다. 근대의 유산인 ‘목줄’에서 탈피하고자 영입했던 ‘히딩크’ 감독의 본질이 근대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에게의 철저한 복종을 전제로 선수단을 운영했으며 오랜 합숙과 강도높은 반복 훈련을 강요했다. 그것은 (우리에겐 매우 당연한 방법이지만)유럽의 축구 전문가가 택하기에는 낯선 방법이었다.

선수 ‘개개인’들을 팀의 ‘수단’으로 사고하는 것, ‘감독’과 ‘선수’를 위계적 질서로 조직하고 통제하는 것은 철저히 근대적 양식이다. 유난히도 ‘강철같은 체력과 톱니바퀴로서의 조직’을 강조했던 그의 화술이 퇴임뒤에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성공을 끌어냈던 그의 방식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한 철저한 ‘배제’의 방식을 택했는데, 김병지, 윤정환 등 자신의 기준에 어긋났거나 부합하지 못할 것 같은 선수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배제’의 지배철학은 앵똘레랑스(intolerance)와 공포 정치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 역시 근대적 지배 수단이다.

반면 ‘본프레레’는 처음부터 유럽의 축구 전문가가 택할수 있는 ‘당연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에게 선수들은 언제나 자신의 역량과 창의성의 최대치를 그라운드에서 보여줘야 하는 ‘프로’였으며, 자신의 위치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을 이뤄가는 과정을 돕는 자로 한정지었다. 이것은 그와 ‘히딩크’가 갈라서는 결정적 지점이다. 아! ‘본프레레’여~ 난 이 실패한 감독에게서 근대의 유산을 극복하고 다른 체제로 나아가려는 ‘전환기의 인식’을 읽는다면, 과잉해석이요, 지나친 연결일까?

축구는 모든 문화 형태중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대중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축구를 읽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축구는 읽는 것은 한국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복잡다단한 실타래를 풀어가는 행위이다. 축구에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개인으로 호명됐던 이들이 ‘히딩크’라는 근대적 지도자를 만나 ‘태극기 세대’라 불리는 열혈 민족주의 집단으로 변모해갔던 과정이 담겨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망령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보여주며, 나아가 근대적 억압과 지배구조의 자가발전을 엿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축구에 주목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축구는 한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메타포이다. ‘히딩크’와 ‘본프레레’는 중요한 상징이다. 축구라 불리우는 질서를, 축구로 상징되는 거대한 상징체계를 깰수 있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근대를 넘어선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p.s
이 글을 쓰는 동안 ‘본프레레’의 후임으로 ‘아드보가트’ 감독이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히딩크’식 과학을 상징하는 ‘베어벡’ 코치와 ‘고트비’ 비디오분석관이 온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영국의 매니지먼트사 캄(KAM)이 한국 축구의 A매치와 각종 대표팀 경기, 전지훈련 등 모든 일정을 관리한지 꽤 되었다. 물론, 감독 추천과 협상도 실제 그들이 대행한다.(축구협회의 무능한 외교력은 돈을 주고 캄(KAM)을 고용하는 순간 도약했다.) ‘아드보가트’는 캄(KAM) 소속이고 열흘전에는 ‘베어벡’이 매니지먼트사를 캄(KAM)으로 옮겼다. ‘히딩크’, ‘쿠엘류’, ‘본프레레’ 역시 캄(KAM) 소속이었다. 자본에 의해 근대적 ‘구조’에 최첨단 ‘기술’이 이식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도 왠지 낯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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