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귀연]의 세상뒤집기
스스로 진지한 백수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문인으로 등단하였고,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과 문제점을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사진을 찍듯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쓰레기통과 허리케인

"테러범! 우리 모두 신고자가 됩시다”

장귀연  / 2005년09월26일 1시29분

쓰레기통은 무척 무섭다

지하철 역의 쓰레기통이 또 사라졌다. 한때 쓰레기통을 싹 치웠다가 항의에 못 이겼는지 은근슬쩍 도로 갖다놓더니만, 요즘 다시 없어졌다. 다 알다시피, 테러 방지책이다. 쓰레기통 있던 자리에는 대신, 테러를 막기 위해서 불편을 양해하라는 엄숙한 게시물이 붙어 있다.

테러(terror), 글자 그대로 ‘공포’. 즉 쓰레기통은 무척 무섭다. 절대로 말장난이 아니다. 현실이다. 요번에 쓰레기통이 없어진 것은 영국 지하철 테러 직후였다. 터널 속의 아비규환, 얼굴이 녹아내린 부상자를 본 사람이라면, 쓰레기통 없는 불편보다 쓰레기통의 공포가 더 크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것이다.

공포는 쓰레기통에서만 폭발하지 않는다. 지난 8월 31일 바그다드에서 천 명이 순식간에 죽었다. 그들을 공습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단어 하나였다. “테러!” 출처 모를 한 마디가 사람들을 글자 그대로 테러(공포) 상태에 빠뜨렸다. 사원으로 향하던 경건한 순례의 행렬은 한순간 아수라로 변했고, 강에 겹겹이 쌓인 시체와 주인 잃은 신발들이 남았다. 이 비극이야말로 테러(공포)의 의미 그대로였다. 테러는 폭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쓰레기통을 두렵게 만들고, 말 한 마디로 천 명을 죽일 수 있는, 절망스러운 공포다.

그러나 물론, 쓰레기통이 공포의 원인일 리는 없는 것. 갑자기 쓰레기통이 공포로 변한 것은 전쟁 때문이다. 나는 전쟁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나 한국인의 이름으로 군대가 이라크의 전장에 가 있다. 전쟁은 단순히 전사(戰死)만으로 계산될 수 없다. 불결한 늪에서 스멀거리는 독무(毒霧)처럼 공포를 피어올리고 감염시킨다. 그 공포만으로도 한국의 우리는 쓰레기통을 두려워하고, 바그다드에서는 공포에 지레 죽을 정도로 절망한다.

빗방울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내리지 않는다

티그리스 강가에서 순례자들이 테러라는 한 마디 말에 죽어가던 그때, 바로 그 전쟁을 시작한 나라에서도 절망과 공포가 휩쓸기 시작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수천 수만 명의 삶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 절망에서 테러(공포)가 발생했다. 시체가 물에 쓸려내려가는 곁에서 총질이 발생하고, 삶의 기반을 모조리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폭력과 강간이 난무했다. 절망에 수장되고, 공포로 난파한 도시. 그러나 역시, 허리케인은 공포의 원인이 아니다.

‘햇살은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비추고 빗방울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내린다’는 말이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허리케인은 결코 모두에게 평등하게 닥치지 않는다. 뉴올리안즈에 남았던 사람들은 차가 없거나 기름값이 없거나 대피할 곳과 비용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가난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 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두 대륙에서 펼쳐진 지옥은 테러(공포)가 친자확인을 하는 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테러는 전쟁과 빈곤에서 태어난다.

테러범 신고

그 시간에 대륙의 다른 끝에서 쓰레기통을 두려워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지하철 타면서 커피 한 잔 뽑아 홀짝이는 걸 즐긴다. 쓰레기통이 없으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도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사소한 불편은 양해하면서 빈 컵을 쥐고 있다가, 자루를 길고 긴 계단 위아래로 끌고다니며 일일이 쓰레기를 담아넣는 청소 아주머니를 보았다. 테러방지대책위원회 쓰레기통분과 위원님들께서는 쓰레기통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지만, 지하철 테러란 내 목숨이 달린 것이지 높으신 분들이 지하철 탈 일은 없을 것이다.

APEC을 맞아 부산 지하철도 쓰레기통을 철거키로 했다고 한다. 부산경찰서 포스터의 테러범 식별요령은 다음과 같다. “계절에 맞지 않은 두껍고 긴 상의를 입은 사람, 체구에 비해 허리와 아랫배가 유난히 불룩한 사람, 쓰레기통에 가방이나 봉지를 두고 급히 가는 사람, 땀을 많이 흘리거나 얼굴 표정이 불안한 사람, 다중이용시설 부근에 오토바이나 차량을 방치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래, 영국 지하철 테러 직후에 긴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던 청년이 경찰의 총을 맞아 죽었었다. 쓰레기 무단투기를 해도, 지하철역 부근에 오토바이를 주차해도, 총 맞아 죽을 가능성이 있다. 배가 나오거나 다한증이어도 위험하다.

이 공포의 협박은 누구를 위한 것? APEC에 참석하는 높으신 분들, 전쟁과 빈곤을 세상에 넘치게 하시는 분들.

부산해운대경찰서의 포스터 제목은 “테러범! 우리 모두 신고자가 됩시다”이다. 그래서 나는 신고한다. 테러범이 테러를 일으키는 근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쟁과 빈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시는 분들임을.

결코 쓰레기통 따위를 무서워하며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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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사진은 관련기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