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안, 혹은 좌파의 불구경놀이
고길섶 / 2004년06월07일 23시17분
또 부안야? 그렇소이다. 나는 부안 이야기로 계속적으로 읅어 먹어야겄다. 우선 부안문제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설령 상황종료된다 해도 그 나의 기억은 도래하는 오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실 부안은 이제 잊혀져가는 듯 하다. 부안 사람들도 스스로를 잊어가고 있고. 지난 4월 총선 결과(열린우리당 후보자 당선)로 욕도 실컷 얻어먹었다. ‘해방구’ 혹은 주민권력에 의한 막강한 이중권력의 최정점을 보여준 2·14 주민투표의 감동적 승리는 곧바로 그 이후의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반핵대책위의 권위주의적 자만심으로 인해 주민들을 ‘공황상태’로 빠지게 하였고 급기야 4월 총선의 실패로 나타났다. 그리고 (물론 농번기의 시작이라는 사정이 있기는 했어도) 투쟁동력도 급격히 상실했다. 그 틈새로 핵마피아집단과 그 똘마니들이 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부안군 지자체가 시행할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찬반 격돌이 예상되며, 부안 주민들은 또다시 거대한 힘으로 투쟁의 절대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다. 7월초에 제2기 군의회 의장선거가 있는데, 현 의장이 군수와 함께 친핵파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가 차기 의장직도 차지할 공략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반핵쪽에서는 대응전략에 분주하다. 군의원 13명중 1명은 반핵대책위 집행위원장으로 수감중에 있고 나머지 의원들의 성분은 반핵쪽 대 친핵쪽이 6:6으로 분석되고 있어 의장 선거 투쟁이 자칫 실패할 우려가 있다. 이는 또한 곧바로 있을 주민투표 조례 제정 저지투쟁과도 직접적 연관성이 있어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부안은 휴화산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활화산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실 부안투쟁 자체에 있지 않다. 이런 사태들 속에서 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해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는 작년 7월 이후 개시된 부안항쟁의 대장정 상황에서 좌파가 한 일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부안항쟁이 핵폐기장이라는 환경-생명-생태-에너지 문제를 넘어서 민주주의 투쟁이고 주민들의 대규모 직접행동투쟁임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좌파는 심정적 지지와 강건너 불구경하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좌파의 무능력이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나 역시 그 안에 포함되지만) 좌파의 무능력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라 도대체 이런 지역적 사태에서 좌파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좌파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제기를 하는 게 무색해보이긴 하나 양자가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좌파의 위기라 할 때 특히 조직적 위기를 일컬을 것이고,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다만 부안항쟁에서 주민투쟁의 역동성을 좌파적 전망으로 연대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기회들조차 놓쳐버린다는 것, 그래서 나는 사실 좌파의 위기가 이런 불구경놀이에서도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좌파가 불구경놀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 조직적 역량의 문제 둘째, 이슈가 너무 많음의 문제 혹은 부안항쟁을 단순히 지역적 이슈로 환원시키는 문제 셋째, 좌파는 부안에서의 외부자라는 인식 문제 넷째, 좌파의 할일을 전통적 방식으로만 이해하여 포괄적이지 못한 문제 다섯째, 부안주민들이 너무 잘 싸워서? 문제 등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부안은 계급투쟁없는 계급투쟁을 속개해왔다. 부안 주민들은 민중이자 다중인 사회적 주체로 급부상했다. 부안은 분명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이라는 거대독점 전력자본 및 전력권력과, 그리고 그에 동맹하는 군정독재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항해 투쟁해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성격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고 감정구조에 의한 적대적 구도로 크게 표현되었다.
나는 이런 지역적 사태에서 좌파의 시선을 외삽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투쟁하는 주민들의 감정구조를 분명히 읽어내고 그 흐름 속에서 세계의 본질적 문제들과 결부시켜 창발적인 상황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도록 하는 방식이 맞다고 본다. 그런데 좌파는 정말 무능력하게도 차라리(?) 전자의 방식도 실천하지 못했으며, 말하나마나 후자의 방식도 실험하지 못했다. 좌파가 이렇게 불구경놀이하는 동안 부안항쟁은 이중적 괴리층위가 형성되면서 한편으로는 왜곡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내가 좌파의 불구경놀이를 씹어댄다 해서 좌파가 개입했으면 부안항쟁이 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불성설이다. 좌파가 능력이 크다 해도 섣불리, 더군다나 ‘좌파세력’으로 무식하게 개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고? 나는 좌파의 능력이란 그 조직적 강력함이나 이데올로기적 그물망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보다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상황에서도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역능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부안만이 아니라, 탄핵사태에서도 드러났는데, 좌파의 무능력은 새로운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데서 비롯되어 보인다.
나는 모험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존재해보지 않은 곳에서 존재해보기. 나는 다만 이것을 상상해본다. 그래서 또 부안이로소이다!
사실 부안은 이제 잊혀져가는 듯 하다. 부안 사람들도 스스로를 잊어가고 있고. 지난 4월 총선 결과(열린우리당 후보자 당선)로 욕도 실컷 얻어먹었다. ‘해방구’ 혹은 주민권력에 의한 막강한 이중권력의 최정점을 보여준 2·14 주민투표의 감동적 승리는 곧바로 그 이후의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반핵대책위의 권위주의적 자만심으로 인해 주민들을 ‘공황상태’로 빠지게 하였고 급기야 4월 총선의 실패로 나타났다. 그리고 (물론 농번기의 시작이라는 사정이 있기는 했어도) 투쟁동력도 급격히 상실했다. 그 틈새로 핵마피아집단과 그 똘마니들이 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부안군 지자체가 시행할 주민투표를 둘러싸고 찬반 격돌이 예상되며, 부안 주민들은 또다시 거대한 힘으로 투쟁의 절대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다. 7월초에 제2기 군의회 의장선거가 있는데, 현 의장이 군수와 함께 친핵파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가 차기 의장직도 차지할 공략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반핵쪽에서는 대응전략에 분주하다. 군의원 13명중 1명은 반핵대책위 집행위원장으로 수감중에 있고 나머지 의원들의 성분은 반핵쪽 대 친핵쪽이 6:6으로 분석되고 있어 의장 선거 투쟁이 자칫 실패할 우려가 있다. 이는 또한 곧바로 있을 주민투표 조례 제정 저지투쟁과도 직접적 연관성이 있어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부안은 휴화산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활화산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실 부안투쟁 자체에 있지 않다. 이런 사태들 속에서 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해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는 작년 7월 이후 개시된 부안항쟁의 대장정 상황에서 좌파가 한 일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부안항쟁이 핵폐기장이라는 환경-생명-생태-에너지 문제를 넘어서 민주주의 투쟁이고 주민들의 대규모 직접행동투쟁임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좌파는 심정적 지지와 강건너 불구경하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좌파의 무능력이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나 역시 그 안에 포함되지만) 좌파의 무능력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라 도대체 이런 지역적 사태에서 좌파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좌파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제기를 하는 게 무색해보이긴 하나 양자가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좌파의 위기라 할 때 특히 조직적 위기를 일컬을 것이고,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다만 부안항쟁에서 주민투쟁의 역동성을 좌파적 전망으로 연대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기회들조차 놓쳐버린다는 것, 그래서 나는 사실 좌파의 위기가 이런 불구경놀이에서도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좌파가 불구경놀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 조직적 역량의 문제 둘째, 이슈가 너무 많음의 문제 혹은 부안항쟁을 단순히 지역적 이슈로 환원시키는 문제 셋째, 좌파는 부안에서의 외부자라는 인식 문제 넷째, 좌파의 할일을 전통적 방식으로만 이해하여 포괄적이지 못한 문제 다섯째, 부안주민들이 너무 잘 싸워서? 문제 등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부안은 계급투쟁없는 계급투쟁을 속개해왔다. 부안 주민들은 민중이자 다중인 사회적 주체로 급부상했다. 부안은 분명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이라는 거대독점 전력자본 및 전력권력과, 그리고 그에 동맹하는 군정독재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항해 투쟁해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성격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고 감정구조에 의한 적대적 구도로 크게 표현되었다.
나는 이런 지역적 사태에서 좌파의 시선을 외삽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투쟁하는 주민들의 감정구조를 분명히 읽어내고 그 흐름 속에서 세계의 본질적 문제들과 결부시켜 창발적인 상황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도록 하는 방식이 맞다고 본다. 그런데 좌파는 정말 무능력하게도 차라리(?) 전자의 방식도 실천하지 못했으며, 말하나마나 후자의 방식도 실험하지 못했다. 좌파가 이렇게 불구경놀이하는 동안 부안항쟁은 이중적 괴리층위가 형성되면서 한편으로는 왜곡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내가 좌파의 불구경놀이를 씹어댄다 해서 좌파가 개입했으면 부안항쟁이 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불성설이다. 좌파가 능력이 크다 해도 섣불리, 더군다나 ‘좌파세력’으로 무식하게 개입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고? 나는 좌파의 능력이란 그 조직적 강력함이나 이데올로기적 그물망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보다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상황에서도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역능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부안만이 아니라, 탄핵사태에서도 드러났는데, 좌파의 무능력은 새로운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데서 비롯되어 보인다.
나는 모험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존재해보지 않은 곳에서 존재해보기. 나는 다만 이것을 상상해본다. 그래서 또 부안이로소이다!
참새회원이라면 누구나 참세상 편집국이 생산한 모든 콘텐츠에 태그를 달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단어, 또는 내용중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서 붙여주세요.
태그:
태그를 한개 입력할 때마다 엔터키를 누르면 새로운 입력창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