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월드컵은 한미FTA의 미래다

[완군의 토마토던지기] '메이저리그가 있으니 K리그를 없애라?"

완군 ssamwan@jinbo.net / 2006년03월17일 11시12분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

의지로 마침내 승리하는 인간과 백의민족의 한을 통쾌하게 메치는 한판이 난무하고 문자 그대로 ‘감격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했던 시절. 교과서에서 80년대 중반 ‘스포츠공화국’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수사들이다. 그땐 정말 그랬나, 아니 그랬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한다고 했던가, 반만년을 이어져 내려온 활을 쏘는 단일민족의 유전자가 ‘신궁 코리아’를 가능케 했다.(고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이 어처구니 상실의 순간. 진실을 덮어버리는 거대한 거짓말. 그렇다면 왜 인류 역사상 최강의 기마 민족이라는 몽골족은 승마에서 금메달을 휩쓸지 못하는가, 썰매에서 태어나 썰매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북방민족들이 동계올림픽을 휩쓸지 못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유도, 레슬링, 권투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많이 딴 이유는 한민족이 워낙에 호전적이고 게다가 치고받는 싸움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텐가.

현대 스포츠에서 승리는 그런 이유들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재응이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것은 선의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자기부정이라 연민이 생긴다. 그는 오른팔에 감사해야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새벽잠 마다하며 운동에 매달렸을 자신의 인생에 감격했어야 했다. 이치로를 ‘굴욕’하게 만든 것은 태극전사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술을 지닌 선수로서 자신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포츠는 그렇게 활용된다. 기성 질서의 모순에 무감각한 개인의 양성을 위해, 체제에 순응하고 감응하는 시민 감수성의 확산을 위해, 비판과 대안의 모색이 아닌 만족과 감동의 공동체를 위해. 애국심을 과잉 조직하며.

오늘, WBC는 스포츠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마취시켜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았다던가, 세계 최강을 무너뜨렸다던가, 이승엽/박찬호에 이름값이 있다던가 하는 따위의 기만은 개발이 환경을 착취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제시한 새만금에 대한 기념비적 판결을 그저그런 뉴스로 전락시켰다.

찌질한 미디어들은 스포츠를 통해 민족을 호명하고 스포츠 승리를 개인의 승리가 아닌 국가의 승리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적 모순과 체제의 불안함을 현혹하고 문제를 축소하려한다. 범국가적 차원의 난동이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는 광폭한 양상이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서글프지만 조건이 변화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데릭지터, 켄 그리피 Jr, A 로드리게스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것도 신자유주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은 메이저리그와 K리그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이 메이저리그가 있으니 K리그를 없애라 요구한다면 어떻겠는가?

조건없는 경쟁, 예외없는 개방, 시장 우위의 사회로 대변되는 FTA 체제는 어쩔수 없는 흐름이거나 대세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합의의 문제이다. 한때 신체가 교역의 대상이었듯, 문화도 먼 훗날 언젠가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 세계 148개국이 합의한 사실이다. 그 합의에 저항하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의 패러다임은 여전히 신체가 교역되던 때에 머물고 있다. 미국이 보이고 있는 작태는 100여 년 전 지구본에 줄을 긋기만 하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있었던 시절의 논리와 똑같다. 절대 우위의 군사적 패권을 바탕에 깔고 백주대낮에 서슴없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 까지 완전히 같다. 한미 FTA는 군사적 보호(혹은 종속)를 약속할테니 경제적 손실을 감당하라는 협박이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북한을 칠수도 있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 구체적 징후의 수준이 아니라 실체적 현실임을 입증하는 근거들이 속속 제시되고 있다. 프랭크 캐프티 미국안보정책센터 소장이 워싱턴타임즈에 기고한 글은(3/7, 『군축은 이제 끝났다』) 섬뜻하고 또 섬뜻하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싱 인도 총리 간에 핵협력협정이 체결됐음을 근거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유명무실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NPT가 깨진 것은 핵무기 보유를 막으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을 가진 인도 때문이 아니라(미국은 인도와 체결한 핵협력협정의 내용은 인도에 미국이 핵 기술과 연료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평화적 목적으로 핵 기술을 사용하기로 한 약속을 어긴 이란과 북한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과 인도의 핵협력협정은 미국의 핵발전산업을 부활시키고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양국 간의 동맹은 자유세계를 위한 전쟁에도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란(과 북한)의 핵무기 보유 의지를 억제하기 위해 또다시 외교적 노력에 매달리는 것은 이란의 완벽한 핵 보유를 도와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군축의 대체 수단으로서 (이란과 북한의) 체제 교체 전략이 필요하다며 이제 군축을 끝내야함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FTA를 요구하고 있는 미국의 본질이다. 노무현 정권이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한미FTA가 필요하다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찌 고백할 수 있으랴, FTA를 체결하지 않으면 미국이 핵을 쏠 수 있음을. 노무현 정권은 완전히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19C 경제관을 지닌 그들은 종속을 어쩔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가관인 것은 숙명적 종속론자 노무현은 자신의 선택을 선구적 관점이라 우기고 있다.

결론 : 월드컵은 한미FTA의 미래다

분명히 말하건데, 2006년 독일월드컵은 한미FTA의 미래다. 오늘의 WBC는 내일의 한미FTA다. 한국이 세계 최강 미국을 이겼으니 긍지를 느끼라고 우리가 세계 최강이라는 최면을 걸라는 현란한 선동사이로 진실 은폐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땄을때가 이랬을까, 그땐 최소한 민족적 자긍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손기정 개인의 활약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는 상식이 있었다.

한미FTA를 완전히 지워버린 언론이 WBC에, 100여 일이나 남은 월드컵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얼마 전 정부가 소위 ‘FTA추진로드맵’이란 것을 밝혔다. 그 로드맵이 담고있는 진실은 하나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독일월드컵까지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국가가 월드컵을 상징조작하고 미디어가 애국심의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성없는 신자유주의자이길 거부하고 공세적인 ‘신개발주의자’가 되고 싶어했던 이명박이 시청 앞 광장을 SKT에게 팔아버렸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청 앞 광장이 추동했던 일련의 사회 변혁들에(87년 6월 항쟁, 02년 거리 응원, 여중생 추모 집회) 몸서리쳤을 이명박 시장이 아예 광장을 재벌에게 팔아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광장을 잃었고, 그 광장은 고스란히 재벌에게 떨어졌다. WBC를 보면 무엇을 생각했는가, FTA의 거의 유일한 수혜자가 될 대재벌이 광장을 독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것은 막연한 내일의 일이 아니다.

모든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녹여 막대한 용광로로 뜨거운 여름을 달궈야할 광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다. 깔때기적 결론을 경계해야겠지만, 이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월드컵이 한미FTA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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