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김동민은 ‘무식’인가 ‘파렴치’인가

어느 모리배의 정신분열

완군  / 2006년05월17일 19시22분

스스로를 ‘참여정부’라 명명한 정치집단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공화국에서 계엄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떠나며 ‘불법․폭력’ 행위에 대한 엄중대처를 주문했다. 그날 이후 대추리․도두리 일대는 고립되었고, KTX 승무원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이것이 ‘참여’ 3년이 남긴 처참한 성적표이다.

바야흐로 ‘정신분열’의 계절이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미쳐가고 있다. 정신분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징후는 여러번 있었다. ‘황우석 사태’ 발발과 이후 논의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이성’의 위상과 역할이 굉장히 제한적일 뿐이라는 걸 적나하게 드러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삼성 X-파일’ 문제는 강고한 자본과 취약한 그 밖의 것들이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어디 그뿐이랴. 개발과 건설의 야만이 법적 정당성을 확보해 새만금을 살해했을 때 우리는 그저 WBC 4강에 열광했을 뿐이었다.

‘정신분열’의 시작이 참여정부 이전부터 잠복해있던 병의 기운이 폭발한 것인지, ‘참여정부’ 자체가 발병 원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의 상황이 참으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각함은 지난 시간 동안 숙성되었다. 철천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순진함, 그리고 그 순진함으로 위장한 영악함이 집단화되고 세력화되는 과정이었다.

지금 평택의 들판은 울고 있다. 이 울음은 마지막을 예고하는 서러움과 어깨를 걸 사람들은 사라지고 깃발만 나부끼는 처연함이 뒤범벅된 울음이다. 그날의 폭력이 어떠했는가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참혹함과 만나는 일이다. 정태춘의 말이었던가, 우리들의 한 시대가 흘러갔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여전히 80년 5월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추리 주민들은 더 이상 깃발 군중을 기다릴 수 없다. 정부는 인권을 옹호하고 농민의 평화적 생존을 지지하는 깃발 군중을 향해 군을 투입했다. 언론은 그들을 ‘극렬․폭력․반미주의 시위동업자들’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기대는 없다. 언론은 차라리 침묵해야 한다. 침묵은 비겁한 것이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훨씬 정직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언론시민연합의 공동대표인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는 국정홍보처에서 발행하는 국정브리핑에 "진보매체들의 균형잃은 '평택'편파보도 : 범대위 주장만 일방적 대변...시위 과격성은 철저 외면“이란 긴 제목의 글을 실었다. 우연히도 김동민의 글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16일(화)에는 ‘문화연대/민주노총서울본부/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전국언론노동조합/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서울대책회의/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주최한 <평택의 평화적 생존투쟁을 테러로 선전하는 언론 규탄 기자회견>이 있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신학림 위원장은 16일 기자회견에서 조중동을 언론이 아닌 범죄집단으로 정확하게 규정했다.

어색한 상황이다. 하나의 운동, 동일한 사안에서 극과 극의 인식이 조우하고 있다. 김동민은 안티조선 운동을 제안하고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낸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민언련은 84년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말’지를 만들어 보도지침을 폭로했고, 현재까지도 언론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단체이다.

그런데 왜 김동민은 미디어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이 평택의 투쟁을 테러로 선전하는 언론에 분개하고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동안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배신행위를 저지를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을까?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던 이들이 피 흘리며 밤 세우며 운동하는 시간에 그들을 ‘과격 시위대’라 낙인찍기 위한 정부 차원의 난동에 동참하는 관변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민언련 입장에서 혹시 억울하다 할지 모르겠다. 대표가 아닌 개인의 자격에서, 사전에 전혀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들도 뒤통수 맞은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글의 내용이 아니다. 또한 정황적인 경위나 기술적인 부분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기고 이전과 이후에 민언련과 김동민이 보이고 있는 태도이다.

김동민은 언론운동가로서 현 국면의 정세에서 정부에서 발행하는 매체에 글을 싣는 것이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가질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적절치 못했다’는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이 종료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김동민이 기고글의 발표될 시기 및 형식 등을 고려하며 글이 가져올 파장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면 ‘무식’의 문제이고, 알고도 썼다면 ‘파렴치’의 문제이다.

민언련 역시 김동민의 대표의 기고글이 어떠한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김동민을 조직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문제아 취급하거나, 철저한 개인으로 외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민언련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식 사과문은 사건을 인지하는 민언련의 수준이 저급하다 못해 저열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민주언론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참여정부를 만들어왔다고 믿으며, 운명공동체적 행보를 보여왔다. 탄핵 국면에서, 파병 문제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서 그들은 노무현을 보호하고 노무현에게 읍소하고 노무현에게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다. 노무현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신분열적 태도가 결국, 함께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을 ‘과격 시위대’로 낙인찍고 정부사업에 저항하는 이들의 역겨움을 정부매체를 통해 고백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김동민의 문제는 참여정부에 참여하며 타락해간 지식인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도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정부에 참여한 이후 보다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정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운동적으로 부패하고, 정신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것을 잃고 파산하는 이들이 안쓰럽고 가소롭다.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다. 오늘을 같지만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이들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누군가를 휘청거리게 괴롭히는 상황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들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모리배들이 있다. 현재 서있는 자리가 그녀/그들을 말한다. 김동민이 대추리에 가봤을까? 온정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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