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축구가 지배하는 세계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축구가 안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

완군  / 2006년06월19일 3시19분

땀구멍이 열리는 순간의 따끔따끔한 감촉, 하나의 허벅지가 낯선 허벅지와 엉켜 창조적 공간을 열어가는 역동성, 한계를 뛰어넘는 생동적 몸짓의 정점에 축구가 있다. 축구는 혁명적 신체, 전복적 신체을 향해 한계를 모르고 달려간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축구를 열광하는가? 또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이 복잡하고 대책없는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축구, 그 자체에 답이 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아주 어린 시절 둔탁한 공의 궤적을 따라 걸음마를 배웠고, 쉬는 시간 10분동안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공을 찼으며, 수능을 앞두고서는 텔레비전 앞에 납작 엎드려 숨죽이며 월드컵에 열광했었다. 축구는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 재미를 보장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축구는 “시장과 민족국가, 기술의 통합”되어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재미의 총체이다.

짧게나마 대학물을 먹고, 민가를 배우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난데없이 2002년이 도착했다. “지루한 일과, 피곤한 인간관계, 반복되는 사물과 상품, 늘상 해결되지 않는 돈과 욕구” 등등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었다. 그것은 궁핍과 부족함의 반복이었고, 억압과 비루함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해결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무엇. 그것은 바로 일상이었다. 사람들은 어렴풋하나마 완고한 일상이 모든 실험과 혁명을 삼켜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완강히 지속되는 일상, 그것은 실로 거대한 위대함이다. 또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한 일상성은 땅에 뿌리를 박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2002년의 난데없음을 둘러싼 체계를 따지려고 했으나 하나 같이 실패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맛보는 일탈을 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경멸했으며, 일탈의 체계를 분석하려드는 지식 권력을 단호히 거부했다. 또 다른 이들은 난데없음의 우연성을 필연화 하려는 시도들을 했다. 광장과 축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열정과 욕망에 관한 찬사가 난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붉은 티를 입고 거리를 점령하고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셨다. 때마침 메인무대에 올라있는, ‘태극전사’라고 명명된 ‘영웅’들까지 승승장구했다. 세상이 모든 질서와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 비껴선 듯 했다. 그 모든 것을 축구가 만들었다고 선전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축제이든 모험이든 혁명이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일상성의 완고한 지속성과 거대한 위대함이 2002년에만 살짝 사라졌을 리 만무했다. 붉은 기운에 도취되어, 아스팔트의 해방감에 망각되었을 뿐이었다. 2002년의 기쁨과 쾌락은 또 다른 일상의 확인이었다. 사람들은 조금 늦게서야 ‘국가’와 ‘민족’에서 ‘자본’과 ‘소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지배구조가 본격적으로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이해했다.

사람들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세계화’의 실체를 확인했다. 무역 장벽이 무너지고 기술 발전으로 세계가 동네가 되고 있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상호의존적 세계 혹은 제국 의존적 세계 질서에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IMF는 극복됐고, WTO체제는 진화하며, FTA는 순항중이다. 브라질의 호나우두, 프랑스의 지단, 잉글랜드의 베컴을 인식하고 그들이 자본의 지휘아래 ‘레알마드리드’에서 함께 뛰는 것보다 더 극적으로 ‘세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는 없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까지 더해졌다. 실로 눈 시린 광경이다.

그렇게 2002년은 그리고 축구는 하나의 지향이 되었다. 우리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또한 세계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심장한 약속이 이뤄졌다. 우리는 그 전환적 순간을 축제로 만들었고 대체로 흥겨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신화는 현실이 되었고, 꿈은 이뤄진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과연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축구는 확실히 신체 감수성의 확장, 몸으로 느끼는 재미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중동에서 축구가 억압적 가부장 질서를 깨고 나가는 서구식 자유를 상징하듯, 유럽에서 축구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져가는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듯, 미국에서 축구가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프로그램을 상징하듯이, 한국에서 축구는 초국적자본의 지배 속에서 대한민국은 부강할 것이며, 한민족의 번영과 소비의 만개를 경험하는 개인의 등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모두가 동시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술이다.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착취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환상이다. 달콤하되 불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현대사회의 일상성과 소비사회의 도래라는 복잡한 인과관계와 다층적 욕망을 ‘국가의 계급적 본질, 즉 그것이 독점자본의 지배도구라는 사실’이라는 쾌쾌한 한 문장으로 독해하려는 이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철지난 유행가가 그럴싸한 훈계와 계몽으로 둔갑 되는 한 결코 축구가 지배하는 세계에 도전할 수 없으며, 돌파할 수도 없다.

2006년 월드컵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축구의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우민을 양산하는 국가계급의 소박한 불량함을 훌쩍 넘어서는 도발적 질문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축구는 손가락일 뿐이다. 축구가 가리키는 달을 봐야한다. “문화적으로 억눌린 동시에, 욕망하는 한편, 자본에 의해 조작되는 대중”을 월드컵이 호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세계화’를 구매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축구일 뿐이라고 선전되고 있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개인으로 호명됐던 이들을 열혈 민족주의자로 변모시켰던 축구이다. 그 퇴행속에는 근대적 억압과 지배구조의 자가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축구가 지금 다시 조건 없는 경쟁, 예외 없는 개방, 시장 우위의 사회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국가주의 장치로서의 월드컵, 구식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게임으로서의 축구를 훌쩍 뛰어넘어 2006년 월드컵이 도착했다. 자본이 깔아놓은 전지구적 꽃비단 길을 따라 신자유주의가 만개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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