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귀연]의 세상뒤집기
스스로 진지한 백수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문인으로 등단하였고,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과 문제점을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사진을 찍듯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 죽기 전에, 싸워야 한다!

장귀연  / 2004년12월27일 22시49분

“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잘 되면... 한진중공업에서도 비정규직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은 현재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좋은 대우를 해 주겠지.”

언제나처럼 인터넷을 켜놓고 일을 하는 도중, 포털 사이트의 뉴스속보란에 ‘계약해지에 비정규직 자살’이란 문구가 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클릭해서 기사를 보았고, 몇 시간 후 유서가 공개되었다. 간단한 속보 기사로는 잘 알기 어려웠던 상황이, 유서에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정규직의 이른바 명예퇴직과 계약직 전환, 다시 외주화, 그리고 냉혹한 해고(계약해지).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고 김춘봉 씨는 산재보상도 받지 못했고, 외주화는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관리자들이 제 입으로 한 약속도 깡그리 무시되었다.

망연해졌다. 이 정황이 놀라워서는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업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도 무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출구가 없는 절망의 벽에 부딪치고 있으며, 고 김춘봉 씨는 그 절망 앞에서 혹시 자신의 죽음으로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그래서 “지금 밖에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다. 꼭 그 사항이 이뤄지길 간곡히 원하고 싶다”며 동지들에게 “이 문제를 풀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당부로 유서를 끝맺었던 것이다. 격렬한 감정도 별로 내비치지 않은, 일목요연한 상황의 정리와 담담한 어조의 당부. 제 목숨을 끊을 정도로 모진 결심은, 이렇게 거대한 절망과 남은 사람들을 위한 작은 희망이 엇갈리면서 이루어졌다. 이 정황이 놀랍지 않다는 게, 놀랍고도 망연하다.

비정규직이 몇 백만 명이니 몇 퍼센트니 하는 수치는, 이제 별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지 모른다. 그런 수치 없이도, 비정규직이 이미 ‘전형적인’ 노동자임을 몸으로 느껴 알고 있다. 이른바 ‘구조조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것으로 정착되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계속 불안정한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과 정부는 이러한 구조조정을 ‘개혁’이자 ‘합리화’라고 칭송해마지 않으면서, 더욱더 노동을 불안정화(그들의 말로는, 유연화)하여 ‘국가경쟁력 강화’를 이루자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그들의 구조조정, 합리화, 유연화, 국가경쟁력 강화, 이 밑에서 노동자들은 죽어간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자본이 ‘자유롭게’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법안들이 제출되었고, 민주노총은 그 법안들의 연내처리가 어려워진 것을 ‘성과’라고 자축하며 총파업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 연내란 며칠이면 끝난다. ‘연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본의 자유를 위한 법안은 언제든지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다. 게다가 실은 그 법안들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이 자축하고 있었던 그 순간에도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지쳐가고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으로써 그것을 증명했다.

글을 쓰다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어, 미디어참세상의 기사를 다시 찾아봤다. 딱 한 달 전, 비정규 법안이 국회에서 왈가왈부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하니 마니 성과니 아니니 하고 있을 때, 그 국회 위 겨울 고공의 크레인에 올랐던 동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구형 공판이 며칠 전 기사로 나왔다. 그 기사("비참했던 삶, 내가 이 법정에 서게 된 이유")에 따르면, 박대규 비정규연대회의 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땅에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더 이상 자신을 극단으로 희생해야 하는 동지들이 안 생길 수는 없는 거냐?” 아니, 박대규 의장은 예언자였던 것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는 이상, 고 김춘봉 씨의 죽음을 예언하기 위해서는, 토정비결까지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혹시나, 더 많은...?

나는 방정맞게 불길한 소리를 입밖에 내놓고 싶진 않다. 그 대신 다른 말을 외칠 것이다.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죽음을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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