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귀연]의 세상뒤집기
스스로 진지한 백수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문인으로 등단하였고, 한국사회의 여러 현상과 문제점을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사진을 찍듯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미소를 파는 자본주의

장귀연  / 2005년01월27일 3시13분

음식점에라도 갈라치면 유난히 불평이 많은 친구가 있다. 종업원이 빨리 안 온다거나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당장 화를 낸다. 나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내 발로 일어나 재떨이도 가져오고 냅킨도 가져온다. 그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 한다.
“고객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야. 그리고 고객이 오면 상냥한 얼굴로 맞아야지, 저 건방진 태도는 뭐야!” 나는 머쓱해진다. 내 권리(?)를 못 찾고 있는 건가, 싶다.

그래서 그는 종업원들이 무릎 꿇고 시중 들어주는 고급 음식점을 썩 만족해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런 곳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KTX 특실을 타게 되었다. 일반실 좌석이 없어 눈물 머금었던 거지만, 이왕 특실을 타고보니, 괜스레 뿌듯, 신분상승(?)한 듯한 기분에 일반실과 다른 점을 둘레둘레 살펴본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여승무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한잔 한잔 음료수를 따라준다는 점. 한두 번이 아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오가며 권하는 통에, 공짜면 다 받아먹자란 신조를 지키려다 붕어가 될 뻔.

그러면서도, 찜찜했다. 굳이 일일이 음료수를 권해야 할까. 차라리 음료수대를 설치해서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높은 경쟁률을 뚫은 재원의 여승무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공손한 인사와 상냥한 웃음, 그리고 차 한 잔 권하는 일이었다는 데 새삼 놀랐다.

매번 나를 당황케 하고 몸둘 바를 모르게 하고 마지막으로 화가 나게 만드는 직업이 있다. 백화점 주차장이나 레스토랑 등의 입구에서, 어여쁘게 단장한 여성이 아름다운 미소와 나비같은 몸짓으로 구십도 허리 숙여 고객을 맞이하는 일. 하루종일 서서 미소지으며 고개 숙이는 노동, 그게 그녀의 직무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일을 했던 한 젊은 여성은 밤마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주무르며 울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그렇게도 힘든 저 노동이 생산하는 사회적 가치가 무엇일까. 고객을 왕처럼 모신다는 표현, 아름다운 여성이 깊이 허리 숙이면 고객은 즐거워할 것이라는 전제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지 않다. 화가 난다.

감정노동, 하인노동이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기치 아래, 서비스 노동자들에겐 무조건 고객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의무가 부가된다. 무조건이다. 얼토당토 않은 요구에 순종해야 하고 추근대는 희롱에도 상냥하게 웃어야 한다. 제품을 설명하거나 안내하거나 주문을 받거나 처리를 하거나 판매를 하는 원래의 용역은 노동자의 자질에서 오히려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더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고객의 감정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노동자의 감정은 통제되어 지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감정노동을 잘 수행하고 있나 감시하러 본사에서 불시에 암행감사가 파견되기도 한단다. ‘매소(賣笑)’, 미소를 판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의 표현이 되어버렸다.

나아가 봉건시대의 몸종처럼 시중을 드는 노동 자체가 제공되거나 독립적으로 상품화되기도 한다. 문에 들어서면 문간에서 허리 굽혀 절하고, 밥 먹을 때면 곁에 서거나 무릎 꿇고 식사 시중을 들고, 찻잔이 비면 냉큼 음료수를 따르고, 손을 맡기면 손톱 손질을 해주고 발을 맡기면 발맛사지를 해주는 것. 중세의 귀족들 생활을 묘사한 것 같지만, 그런 노동은 점점 더 많이 제공되고 있다. 역시 글자 그대로 고객은 ‘왕’이니까. 물론 돈만 충분히 낸다면 말이다.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비하하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비록 힘들어도 미소가 고객을 기쁘게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갖는 건 비판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일자리가 줄어드는 마당에 그런 서비스의 일자리라도 팽창하는 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거의 비정규직이고 대단히 열악한 그런 일자리들의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 관건으로 간주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감정노동과 하인노동의 팽창은, 현 시기 자본주의의 음울한 그림자를 표현한다. 혹자는 생산과 소비의 한계에 부딪친 자본주의의 징후라고도 본다. 생산 확대와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시대는 지나갔다. 일자리는 줄어든다. 자본 도피가 어려운 서비스업, 그 중에서도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감정노동의 성격이 강조된다. 20/80의 사회, 금융자산가 및 이들과 연관된 골든칼라의 20%와 나머지 80%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그 20%를 주타겟으로 한 고급소비 및 하인노동이, 줄어든 대중소비와 생산적 일자리를 일부 대체한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내포적 확대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자본주의적 관계에 덜 포섭되었던 틈새들, 그러니까 인간의 감정, 생각, 돌봄 등의 영역들마저 자본이 급속히 잠식해 들어가고 상품화하는 과정이다.

또한 이는, 자본주의적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돈만 내면, 아니, 돈을 내는 순간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받는다. ‘무조건적인 복종’이란 봉건적인 신분관계의 특성이지만, 이제 돈이 많은 사람은 일상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은 가끔, 귀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극한에 다다른 자본주의는 ‘신분의 느낌' 그 자체를 점점 더 많이 판매한다.

이런 일자리라도 있는 게 다행일까. 아마도.
이런 일자리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투쟁해야 할까. 물론.
그러나 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한 인사가 노동이 아니라 마음인 곳. 복종하거나 받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는 곳.
이 모든 것이 ‘고객의 권리’가 아니고 ‘인간의 권리’인 사회, 바로 그런 곳 말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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