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의 가방
'92년 8월부터 현재까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인권이야기는 이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말만큼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필자가 가리키는 인권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아직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은 인권의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빼앗긴 것에 대한 추억

류은숙  / 2005년01월27일 14시18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곪디 곪아온 상처가 터져버렸는데 이미 다 꿰매버린 상처라고 큰소리치는 자들에게서 치유불능의 오만을 본다.

이 일을 보면서 내가 고교시절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해외순방을 나가는 대통령 환송·환영단의 역할을 맡게 됐다. 당시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 물론 강제동원이었다. 한복을 챙겨입고 대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없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입어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에 가는 길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우리를 운동장을 가득 메운 대형버스가 실어서 김포공항 활주로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너시간 동안 태극기를 들고 있는 법, 흔드는 법에 대해 끊임없이 연습을 했다.

파김치가 되어갈 무렵 대통령 내외가 등장했고, 우리는 서너시간 동안의 연습의 분풀이를 하듯 열렬하게 환송을 했다. 대통령 내외가 우리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인 시간은 불과 5분도 안됐다. 그렇게 힘든 국민 된 도리를 하고 활주로를 나온 우리는 당황했다. 우리를 데려다 준 버스가 없었다. 집까지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알아서 가라는 것이었다. 집과 학교밖에 오간 일이 없는 우리로서는 김포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치렁치렁한 한복 치마를 말아 쥐고 걷고 또 걸었다. 갖은 고생 끝에 해가 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며칠 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을 환영하는 것이었다. 역시 활주로에서 몇 시간을 대기했다. 볼멘 우리들 속에서는 아직 일본에서 비행기도 안 떴다더라는 소리가 떠돌았고 여기저기서 욕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몇 분간 열띠게 태극기를 흔든 후에 또다시 활주로에 버려진 우리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빌려 입은 한복은 드라이를 한 후 돌려줘야 했다. 5천원이나 들었다. 1-2천원 하던 참고서 한 권도 사기 힘든 형편에 큰 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에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공책 몇 권을 나눠줬다. 이틀 간의 노역의 대가였다. 그리고 며칠 후 교실마다 소형 TV가 들어왔다. 알고 보니 우리들 한복대여비용과 교통비로 각자에게 지급돼야 할 돈을 학교가 학교시설발전비용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TV를 원한 일이 없었다. 그 TV는 애국조회와 미션스쿨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예배시간에만 활용됐다. 교장선생님의 훈화와 교목 선생님의 설교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우리들의 분노는 쉬는 시간의 잡담에 녹아들었을 뿐이었다. "정말, 열받는다, 그치?"라는 공감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때의 분노를 오늘 다시 기억한다. 그때 일본을 다녀온 대통령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한마디 받아왔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 대통령 이전의 독재자가 식민지배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땀을 '당신들을 위해서 썼다'는 파렴치한 말을 믿을 수도 없다. 그 희생이 어떤 희생이었나. 몇 시간 활주로에 동원당한 기억도 쓰디쓰기만 한데, '어머니 배가 고파요'를 낙서로 남기며 강제노동으로 죽어간 사람들, 육체와 정신을 유린당한 군위안부, 가족과 고향과의 탯줄이 끊긴 채 이국땅을 떠돌아야 했던 수많은 해외동포들과 그들의 차별받는 지위, 2세·3세를 이어지고 있는 원폭피해자 등의 희생이 아니던가.

그럼, 이들 희생자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있는가. 빼앗겼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되찾아줘야 할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참조할 수 있는 것으로는 96년 8월, 유엔인권소위에서 다룬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이 있다. 아래와 같이 그 내용 중 몇 가지만 살펴봐도 한일협상이란 것이 얼마나 반인권적이었나를 가늠할 수 있다.

*모든 국가는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 누구에게나 적절한 법적 구제가 가능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구제에 대한 권리는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국내적 국제적 절차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모든 국가는 국제법상 범죄를 구성하는 인권침해에 대한 보편적 사법권을 제공해야 한다.
*국가는 신속하고 효과적인 배상을 위한 특별수단을 채택할 의무가 있다. 배상은 부당한 행위의 결과를 제거하고 보상함으로써, 그리고 침해를 방지함으로써 정의를 세운다. 배상은 침해사실의 중대함의 정도와 손해에 비례할 것이며, 반환, 보상, 갱생, 사죄, 재발방지 약속 등을 포함한다.
*모든 국가는 배상절차를 국내외에 공식·비공식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희생자 배상에 관련된 결정사항은 부지런하고 신속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사죄 및 재발방지는 다음을 포함한다.
-사실 확인 및 진실의 완전하고도 공식적인 공개
-희생자 또는 희생자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존엄과 명성, 법적 권리를 회복시키 는 사법적 결정 또는 공식적 선언
-공식적인 사실확인과 책임인정을 포함한 사죄
-희생자에 대한 기념
-인권침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역사교과서와 인권훈련과정에 포함시킬 것

이 일이 있고 나서, '사과라도 한 번 제대로 받아봤으면'이라고 울먹이는 병상의 군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을 TV에서 봤다. 제철소와 고속도로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강탈해간 변명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모습에서 재차 확인했다. 빼앗긴 것에 대한 추억을 더 이상 만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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