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의 언제나 영화처럼
삶은 영화를 꿈꾸고 영화 또한 삶을 꿈꿉니다. 푸른영상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장애와 여성과 가난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가난하면 안 되나?

류미례  / 2005년03월14일 13시06분

큰애 하은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가 365일 코너에 잠깐 들렀다. 통장정리를 하기 위해서다. 시장 안에 있어서 그런지 그곳에는 자주 아주머니들이 앉아있다. 그냥 앉아있다. 아마도 따뜻하거나 시원해서일 것이다. 보통 외출할 때엔 작은애를 업고 큰애 손을 잡고 다니는데 그런 모습 때문인지 어른들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365일 코너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방긋 웃는다. 나도 따라 미소를 보내고 통장을 밀어넣었다. 통장이 나오길 기다리며 나는 콧노래로 “엄마는 돈이 없지. 돈이 없지. 엄마는 가난하지. 가난하지”하고 흥얼거렸다. 정말 아무 생각 없는 흥얼거림이었는데 갑자기 옆에 계신 아주머니가 정색을 하시며 말했다.

“애기엄마. 그러면 안돼~!”
약간 놀라며 돌아보니 아주머니 말씀.
“그렇게 어린 애가 뭘 알아듣겠어? 그러니 같은 말이라도 ‘엄마는 부자야’ 그런 식으로 말해야지. 가난하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어? ‘엄마는 부자야’. ‘엄마는 돈이 많아’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해.”
나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저는 괜찮은데요”하고 말했고
아주머니는 다시금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앞으로는 애들 듣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엄마는 부자야’라고 그렇게 말해”
그동안 통장정리는 끝이 났고 나와 하은이는 아주머니한테 “안녕히 계세요”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는 괜찮은데요’라고 단 한마디 밖에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주머니, 저는 가난한 게 좋은데요. 부자되고 싶지 않은데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아주머니가 불쾌해하실까봐 나는 어물어물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색하는 아주머니를 따라 나도 정색하고 말을 해버리면 아주머니는 ‘아니 새파랗게 젊은 것이 날 훈계하는 거야?’ 혹은 ‘내숭떨고 있네’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실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그런 말은 한마디도 못한 채 방글방글 웃으며 ‘괜찮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호의에서 비롯된 아주머니의 당부말씀에 정색을 하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그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아주머니와 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모 카드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CF는 재밌게 보았지만 나는 그 후 사람들이 덕담이랍시고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배용준이 모 투자사 광고에서 “나는 부자아빠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병아리같이 귀여운 유치원생 아기들 앞에서 따뜻한 웃음을 지을 때에도 나는 씁쓸했다. 도대체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난을 수치로 여겼던 건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태도지만 이런 식으로 부자되기를 종용하고, 부자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공공연하게 말해지는 건 사실 낯설다. 아이들 사이에서 경제 관련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고 많은 아이들 꿈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잠깐 망연해지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올케언니가 해준 말인데 예전의 우리들은 과학자니, 대통령이니 뭐 이런 식의 추상적인 꿈을 꿨던 반면에 요즘 아이들은 “프로게이머로 성공해서 서른 살 이전에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라든지 “벤처 사업가가 되어 10억 정도를 벌고 나면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와 같이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꿈의 경로를 제시한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의 말들 또한 나를 소름끼치게 만든다. 무엇보다 나는 하은, 한별, 내 아이들이 그렇게 변할까봐 무섭다.

푸른영상의 서경화감독이 만든 <기찻길 옆 공부방>은 공부방 글짓기 시간에 반 친구들에게 자신이 사는 동네를 숨겨야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눈물에서 시작한다.

"이제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저기 저 큰 교회 뒷편에 있는 판자집들이 나의 동네라고 그렇게 말하겠다"

가난은 그저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아무리 힘주어 말한다 하더라도 가난은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다. 커지고 넓어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무능력하다는 것, 또는 게으른 것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그 세상 한 편에서 가난의 상징인 만석동을 선택한 사람들, 바로 기찻길옆 공부방 사람들의 일상이 조용히 펼쳐진다.

보면 볼수록 그 영화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그건 두려움이다. 남편은 항상 부모가 열심히 살면 아이들은 그 모습을 통해 힘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런 두려움을 갖기 전에 내 삶에 떳떳하면 된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섬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우리 하은이, 한별이가 돈을 알게 되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그리고 엄마, 아빠는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애들이 실망하면 어떡할까? 나를 원망하면 어떡할까? 지금이라도 나는 이기적인 엄마의 자리를 벗어나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걸어가다 ‘맛있는 반찬 50% 세일’이라고 써붙여진 좌판을 만났는데 하은이가 갑자기 꽃게를 사달라고 했다. 얼떨결에 만원어치 게장을 사들고 오면서 잠깐 후회했다. 이런 식으로 충동구매를 하면 안되는데 항상 사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다.

"공부방은 아이들에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한다. 가난한 현실을 무시하지도 외면하지도 말고 똑바로 쳐다보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은이가 사달라고 하는 걸 한 번도 거절해본 적이 없다. 내가 가진 돈이 없을 때에는 “아빠한테 말해보자”라는 식으로 넘겼고 그러고나서 아이도 나도 잊어버리는 식이다. 내 아이는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결핍이 무엇인지 전혀 겪어보지 못하며 살고 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우리 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다고 기억한다. 가난에 대해서라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생활인으로서 가난을 느껴보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가난이란, 내 어미의 거친 손마디와 늦은 밤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언니들의 꺼칠한 얼굴빛에 머물러있었을 뿐이다. 나는 한 번도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위해 엄마는, 오빠나 언니들은 그만큼 자기 것을 내주었을 것이다. 남편을 만났을 때, 그 사람과의 미래에 가난이 있다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 신혼집의 그 밤들. 내 아이가 탁한 공기 때문에 감기를 달고 살 때면, 그래서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루고 기침을 할 때면 문득 그 지하의 공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게 있는 선택의 가능성들, 그리고 내 시간들과 바꿀 수 있는 세상의 가치들을 헤아리며 생각했다. 가난한 건 참 싫은 일이라는 것을.

지금 나는 5층에 산다. 실내 공기는 쾌락하고 햇빛과 바람은 잘 통한다. 나는 내 생활 중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 교회에서 주는 사택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타인의 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젖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약하다. 지금 이 시간 가장 걱정되는 건 좀있다 저녁에 있을 동창회이다. 고향 해남의 친구들을 20년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그 자리를 생각하면 반가움과 걱정이 교차한다. 내 친구들은 다들 어른이다. 대부분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났고 자신의 힘으로 삶을 꾸려왔고 그래서인지 부자되는 것이, 대박 나는 것이 소원이다.

나는 그 사이에 앉아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가끔씩 전화를 해서 남편자랑, 시댁자랑을 하는 과거의 내 친구들은 정말 낯설다. 그러나 그들은 내 친구들인 것이다. 어쩌면 하은이와 나는 지금 같은 나이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대로 세상을 보지 못했던 나와 이제 새롭게 세상을 알아가는 유하은. 나는 많이 깨지고 좀 더 단련되어야겠다. 또 좀 더 자라야겠다. 나의 미래는 어떤 빛깔일까. 그 대답이 저절로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인의 장막을 치고 그 속에서 세상으로 나갈 내 아이를 걱정하는 건 이제 그만 해야겠다. 나는 이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단단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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