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청량리에서 태어나 계속 청량리에서 살았으며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개기기, 여기저기 간섭하기, 음정/박자/가사 다 무시하는 노래 신나게 부르기, 큰 소리로 떠들기, 사람들 갈구기 등 눈치 없이 신.나.게.그.렇.게.아.무.렇.게.나 살고자 한다.

그들에게 조폭의 꿈을 심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완군 ssamwan@jinbo.net / 2005년03월17일 16시16분

난데없고 뜬금없다는 말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경찰청이 주최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여성․청소년 워크샵’에서 터져나온 한 교사의 돌발적 발언이 나온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정부는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쯤되니 세상은 그 교사의 증언을 은폐되었던 사실을 폭로한 용기로 평가하고, 언론은 무대응의 소치를 범한 정부를 강경하게 질책하고, 정부는 다시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을 동원하여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일전불사의 각오를 다지는 상황을 맞았다.

그런데 희한하다. 여기서 누군가 호황을 맞게 생겼다. 그 교사의 증언이 있기 며칠 전 여론을 떠보는 성격이 짙어보였던 ‘스쿨폴리스 제도’에 비판적이던 발표 당일의 분위기는 어느새 학교폭력 대응을 위한 유력한 대안으로 ‘스쿨폴리스 제도’를 논의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나 더 'CCTV'는 학교폭력 감시의 절대적 임무를 새로이 부여받을 것이 유력해 보인다. 그리하여 ‘40만’에 이르는 학교내 일진들을 잡기 위해 경찰과 CCTV를 동원하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으로 보인다.

내 기억에 ‘일진’이라는 단어가 교실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것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 옆에 있었던 중학교의 아이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당시 신화처럼 증폭되며 무시무시한 상상을 수반하던 그 ‘일진’들은 그러나 어이없게도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되었고, 학원같은 곳에서 만나기도 했으며 놀이터에서 만나 자주 술을 마시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빰 친다는 그들의 정체는 그렇게 허무하게 산화되어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담기고 핸드폰 번호로 저장되었다. 물론 그들은 주말의 유흥비를 만들기 위해 돈을 뺏기도 했고(그러나 내 기억에 부모의 돈을 훔치거나 삥당 치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기는 하다), 서열을 정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처럼 강탈을 위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고, 다른 학교 심지어 지역간의 대규모 ‘전쟁’을 위해 합숙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러니 아니꼬운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한 번이라도 학교가 그러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의 학교 체계에서 일진을 없애는 것이 과연 가능키나 한 일인가. 굳이 푸코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학교는 권력에 순종적인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고안된 ‘감시와 처벌’ 제도 중에서 감옥과 함께 가장 효율적인 곳으로 지목되어 양성화 된 곳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권력은 그 제도에서 가장 우수한 적응력을 보인 아이들을 권력에 편입시킨다. 소수는 반드시 선택받는다는 환상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을 위한 관용과 배려는 사실상 논의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의 빛나는(!) 교육 전통(부국강병)을 이어받은 곳이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교련과 조회로 상징되는 ‘군국주의 문화’와 ‘가부장제 전통’을 위해 봉사하던 곳이었다. ‘군국주의 문화’와 ‘가부장제 전통’의 핵심은 약육강식과 줄 세우기이다. 이를 위해 학교는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강해질 것을 강요해왔고, 성적순으로 키순으로 갖은 방법들을 통해 줄 세우기의 서열의 정당성을 극대화하고 체화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약육강식’과 ‘줄 세우기’가 학교의 내포를 이루는 일상적 문화라면, 진정 끔찍한 학교의 외연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학교 간의 위계이다.

그리고 학교 간의 위계를 상위학교 진학만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나날이 교묘해지고 적나라해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아이들은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학력의 되물림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그 외의 수없이 많은 조건들 역시 갖춘 아이들이다.(다소 과장되었겠지만,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5,000만 원이 들며 소위 SKY라 불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억이 든다는 농담은 우리의 교육 현실의 뼈아픈 자화상이다.) 알만한 대학에 진학이 가능한 조건을 갖춘 열명 남짓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교실의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사회와 학교가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이제 거의 들지 않으며, 더 이상 누구도 학교와 사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머지 아이들이, 대학에 가기 위한 조건에서 배제당한 잉여의 아이들이, 담임들에게 조차 버림받은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가당치않게 오히려 학교는 그동안 그들이 너무나 무서웠다는 순애보적 고백을 위장하여 당장 몰아내겠다는 음흉한 미소를 훔치고 있으며, 이에 호응한 사회는 그들을 ‘예비 범죄자’로 규정하고 강력히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기만과 야만의 시스템에 우리는 너무도 너무도 무기력하다.

‘일진’에 대한 ‘고의적인 외면’과 ‘급작스런 호명’은 분명 누군가의 수지에 맞는 장사일 것이다. 눈에 띄는 손해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훌륭하기까지 하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가와 언론이, 학교와 사회가 아이들의 미래를 퇴직 경찰의 노후보장과 CCTV 업계의 성장을 위한 미끼 상품으로 기꺼이 던지는 ‘상도덕 없음의’ 아사리판이 계속되는 것은 결국 누구도 장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는 질주일 뿐이다.

일찌기 이이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실패했었다. 실패의 이유는 그 ‘10만’이 폭도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후세의 역사는 그 ‘십만’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평하고 있다. 계산대로라면 우리에겐 이미 ‘40만’ 양성되어 있다. 그들에게 조폭의 꿈을 심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P.S
어느 학생이 개작한 시이다. 이 학생이 학교생활을 정리한 <학교대사전>이라는 블로그는 정말 대단하다. 강추!! http://myhome.naver.com/ssanzing2/

고3의 사랑 노래
원작 신경림

고3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공부가 끝나 돌아오는
가로등 밝힌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고3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성적표 오는 소리 매미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고3이라고 해서 재미를 버렸겠는가
컴퓨터 하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복합 상영관에 한 관 남았을
보고싶던 영화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고3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고3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와 감상

한 고3 청소년의 삶을 소재로 수능시험을 치는 이들에 대한 따뜻함 즉, 휴머니즘적인 작가의 태도가 잘 드러난 시이다. '공부하는 기계'라는 자들이지만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과 사랑을 가진 한 인간임을 시인은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수능 때문에 이러한 인간적 감정들이 묻혀버리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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