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선]의 에듀워스토리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서울 구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범국민교육연대 활동과 진보교육연구소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교육과 문화적 실천으로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길 찾기에 노력 중이다.

학교는 좀비?

천보선  / 2005년03월23일 16시51분

1. ‘학교대사전’을 아시는가

‘고삼 - 아플 자유도, 딴청 필 자유도, 게다가 놀 자유는 더욱 없는 다소(?) 불운한 종족을 말한다. 일단 긴 근무시간이 제일 문제이며 두 번째로는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니고 일해도 일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1월 25일에 인터넷에 공개된 지 한 달도 안 돼 30여만 명이 넘게 접속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는 ‘학교대사전’이라는 한 웹 문서의 일부다. 불쌍한 한국의 고교생을 참 잘도 묘사했다. 학교생활과 관련된 여러 단어의 뜻풀이를 학생들의 입장에서 위트와 풍자, 역설로 재구성하고 있어 이름이 ‘학교대사전’이다. 처음엔 이번에 고교를 졸업하는 몇몇이 만들었는데 공개 이후 인터넷을 통한 자발적 참여자들의 아이디어로 계속해서 버전 업 되고 있는 중이다(처음엔 360여개였다가 3월초 현재 600여개 단어 수록). 일단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난기서린 표현들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심장한 웃음들을 선사한다. 한번 보시라.

‘음서제도(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저지르는 비공식 제도. 검사나 유력자들의 자손들이 제대로 된 시험은 치지 않고 점수를 얻는다...)’나 ‘칠차교육과정(이천오학년도 대입 시험부터 적용되는 교육 과정. 교육부가 무슨 짓을 해도 욕을 먹다 보니 참다못해 한번 막가보자는 의도로 만든 제도)’ 같이 교육비리나 정책에 대해서도 냉철한 통찰이 담겨있는데 그래도 역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로 입시경쟁과 통제 속에 누적되어 온 아이들의 애환과 생각들이다. 몇 개만 소개해 본다.

‘점수 - 학생들이 단 1점에도 목숨을 걸고 있는 숫자. 非點勿視 (비점물시) :점수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 非點勿聽 (비점물청) :점수가 아니거든 듣지도 말며 非點勿言 (비점물언) :점수가 아니거든 말하지도 말라.’
‘내세(來世)사상 - 시험 결과에 초연한 학생들의 정신적 사상. 언제나 다음번에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교실 - 열역학 제2법칙의 지배를 받는 약 8m × 10m × 2.5m의 계를 일컫는다... 학교의 탁아 기능의 95%가 이곳에서...’ ‘
교권신수설 - 교실을 지배하는 교사의 권리는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는 무서운 주장.... 절대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관습법 - 교칙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도 단속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0순위 교칙...'
’자유주의 -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이념. 학교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의 복장, 두발, 월담, 잡담, 도박, 흡연, 0교시 수업, 수면, 등하교 시간, 수행평가, 매점 이용, 급식, 불우이웃 성금, 수련회, 수업 과목 등 일부사항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자유를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우수작(!)들이 있음을 능히 짐작할 만 한데 어쨌든 ‘학교대사전’은 입시와 통제 속에서 쌓이는 아이들의 애환과 학교의 실상을 매우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진실의 일단을 적나라하게 비틀고 꼬는 데서 오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도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이 웹 문서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널리 유포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 때문이리라.

2. ‘감옥 학교’, ‘죽은 학교’

이 웹 문서에서 그려지는 학교는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감옥과 같은 곳이다. 즉 입시체제와 통제기제에 의해 꽉 짜여져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그러면서도 헤어나기 어려운 감옥인 것이다. 이를 하나의 표상으로 ‘감옥 학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감옥 학교’의 상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동안 많은 세대에 연속되어 온 오래된 이미지이다. 그리고 세대를 넘나드는 이미지일 뿐 아니라 나라를 넘나드는 ‘세계화’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특히 진보적 시각을 지니려는 사람들에게 ‘감옥 학교’에 대한 이미지와 분노는 더 강렬하다. 그 때문에 ‘학교대사전’과 같이 아이들이 직접 구성한 풍자집은 흔치 않았지만 비판적 논의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보울스와 긴티스(Bowles와 Gintis)는 ‘경제적 재생산론’으로 알려진 논의에서 공장에서의 위계와 통제가 학교조직 및 규범에도 반영된다고 하였고, 한국에서도 80년대부터 군사독재의 병영문화가 학교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분석되면서 학교는 병영으로 묘사되었다. 감옥학교에서 가해지는 통제와 억압은 ‘경쟁과 선발’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런 점에서 ‘감옥학교’는 ‘경쟁학교’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 극단적 대학서열과 입시지옥으로 세계최고 수준의 과잉 경쟁, 과잉 통제를 자랑한다.

‘감옥학교’ 문제는 학교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도대체 ‘학교라는 체제에서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이 질문 속에서 등장한 것이 ‘죽은 학교’ 개념이다. 학교를 통해서는 더 이상 교육본질의 실현과 인간해방의 가능성과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된 것이다. 70년대 라이머(E. Reimer)는 ‘학교는 죽었다’고 선언한 바 있으며 그와 논의를 같이 한 일리치(Illich)는 ‘탈학교의 사회’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학교는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오인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교육이라고 오인하고, 졸업장을 능력으로 오인하며, 언어의 유창성을 창의성으로 오인한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학교 밖에서 배운 것이고 학생은 교사와 관계없이 배우기 때문에 학교는 필요 없다.’고 보면서 학교체제가 아닌 새로운 교육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탈학교의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에서도 90년대말 이한이라는 젊은 교육운동가가 ‘학교를 넘어서’는 대안적 교육체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다. 이들 논의를 단순화한다면 학교에서 더 이상의 희망과 생명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감옥학교’를 넘어 ‘죽은 학교’로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시각에서 ‘죽은 학교’는 적지 않은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3. ‘좀비 학교’

그런데 그냥 ‘죽었다’고 하기에 문제가 좀 있다. 죽은 학교가 도무지 가만있질 않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여 나간다. 제도도 변화고 내용도 변하고 교사-학생의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해 나간다. 죽은 채로 움직이니 그렇다면 ‘좀비 학교(?)’라 할 수도 있겠다.

움직임은 최근에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교육개방에, 구조조정에, 새 교육과정에, 새 대입제도 등 새로운 정책들이 쏟아진다. 소위 신자유주의시장화 공세 때문이다. 2005년 올해 들어서는 더 난리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교육도 상품’이라 부르짖고 있고 대학은 구조조정, 초중등에서는 일제고사부활, 우열반편성, 0교시강화니 해서 학교마다 정신이 없다. 여기에 교사와 대학생들의 저항도 일고 있다. ‘수능부정사태’에 이은 ‘내신조작’에 ‘서강대 입시부정’ 사건들도 터진다. 이 와중에 ‘감옥학교’를 더 강화할 ‘스쿨폴리스제’가 추진되고 ‘일진회’에 대한 선정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급기야 학교내 CCTV 설치까지 거론된다. 어쨌든 바야흐로 학교는 이제 매우 바삐 움직이는 ‘방정맞은 좀비 학교’ 쯤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의문이 하나 든다. ‘학교는 죽었다는데 왜 이토록 끊임없이 움직이는가?’

4. 학교는 살아있다

결론적으로 학교는 좀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최소한의 생명력마저 상실한 채 죽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나라 민중의 아이들이 있고 노동계급의 일원인 교육노동자가 있다. 천만이 넘는 민중의 아이들과 노동계급이 있는 곳에 어찌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없겠는가?

민중은 학교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왔다. 죽게 할 수가 없었다. 학교가 아니고서는 최소한의 교육권마저 누릴 수 없는 민중에게 학교를 더욱 민주적이고, 민중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앓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학교를 지배하려는 지배자들의 욕구와 교육에 대한 민중의 요구가 끊임없이 부딪치기 때문이다. 그 부딪침 속에서 학교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학교는 태생 때부터 몸살을 앓아 왔다고 할 것이다. 애초부터 학교는 자본의 요구만이 아니라 교육권 확보를 위한 민중의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며 공교육발전의 역사는 자본중심적 포섭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중교육권발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죽은 학교’의 비판적 문제의식은 타당하지만 일면적 규정의 위험을 갖는다. 지배와 통제는 보지만 민중의 요구와 저항,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역동적 힘과 가능성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를 ‘희망 없는 죽은 공간’으로 봐 버린다면 학교 외에 다른 수단이 없는 민중에게는 사실상 절망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학교 아닌 다른 교육체제를 꿈꾸었던 모든 시도들은 실패하거나 주변화되었다. 그것은 ‘사회화된 교육체제’로서의 학교가 ‘생산의 사회화’라는 역사적 조건과 필수적으로 결부되기 때문이다(생산의 사회화, 교육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체제와 연관되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차원의 역사적 조건이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에서도 불가피한 형태이다.). 천만이 넘는 민중의 아이들에게 공교육 말고 그 어떤 형태로 교육권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권을 향한 민중의 요구가 있는 한 학교는 죽어 있을 수 없으며 민중적 생명력이 발현될 때는 커다란 역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학교는 매우 역동적인 분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전의 학생운동이 그러했고 교원노조운동이 그러하다. 최근에만도 WTO교육개방반대투쟁, 네이스투쟁, 고교등급제투쟁 등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어 왔다.

5. ‘감옥’의 울타리를 치우고 ‘진보 학교’로

또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학교가 살아있다면 ‘감옥 학교’를 넘어 온전히 민중이 주체가 되고 지식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는 학교, ‘진보 학교’는 가능할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사회 변혁 이전에 진정한 ‘진보 학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독점적 학교지배, 즉 ‘감옥학교’를 깨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고 매우 중요하다. ‘감옥학교’의 입시와 통제, 지배이데올로기를 깨 나가는 만큼, ‘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올려나가는 만큼 지금보다 해방의 토대는 넓어지며 학교안팎의 전진 속에서 진보적 교육구조는 준비되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옥 학교’를 깨고 민주적인 ‘진보 학교’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주체들을 역동적으로 일궈나갈 수 있다.

신자유주의 공세 이후 학교의 잠재적 역동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민중과 자본의 대립되는 요구가 서로 커지면서 충돌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화논리를 앞세운 지배세력의 공세도 전면화되고 있지만 대학평준화나 무상교육실현 등 민중의 요구도 한 층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 동안 형식적 중립에 가려져 있던 교육의 계급적 성격도 이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교를 통한 신분상승 신화’는 이미 깨졌으며 교육비나 학벌주의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경련 등에서는 직접적인 ‘이데올로기 교육’을 요구하고 있고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 지역의 초등학교 취학배정 취소 사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국의 부유층들은 ‘그들만의’ 배타적 교육을 공공연히 내걸기 시작했다.

향후 수년 간 한국사회에서는 학교교육의 향방을 둘러싸고 ‘교육개방’에서 ‘대학평준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대립과 공방이 전개될 것이다. 그 결과가 ‘감옥학교’의 입시와 통제가 더 강화되는 것이 될지 아니면 ‘감옥 학교’를 넘어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진보 학교’를 만들어가는 흐름이 될지는 민중적 생명력이 어느 정도 발현되느냐에 달렸다.

통쾌한 풍자에도 불구하고 ‘학교대사전’에는 아직 ‘감옥 학교’를 넘어설 수 있는 극적 반전은 없었다. 입시와 통제에 신음하면서도 그것을 본래부터 주어진 것(천부입시설?)으로 받아들이면서 대체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의 한계라기보다 아직까지 감옥 학교를 깰만한 전망과 힘을 만들어 오지 못한 진보진영이 지닌 한계의 반영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맹아는 이미 싹트고 있었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간파’ 속에서 ‘감옥 학교’의 울타리는 이미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쟁과 새로운 통제가 강화되고 있는 지금 ‘감옥학교’가 아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표상화된 사실 자체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역동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터질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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