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화된 노동자의 노후보장, 퇴직연금

[퇴직연금 약인가 독인가](4) - 퇴직연금의 본질과 폐해

정해식(한노정연)  / 2005년12월06일 9시35분

아직은 먼 이야기...

퇴직연금제도 도입의 첫 번째 계약이 어느 금융회사에서 이뤄질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금융상품의 블루오션으로 퇴직연금시장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란과 무관하거나, 또는 그 소란 속에 끼어들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4대보험이 1인 이상 사업장에 확장된다고 할 때도 그들은 여전히 보호받는 노동자의 범주에 해당되지 못한다.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는 그전에도 퇴직금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노동자의 노후소득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의 혜택 역시 받지 못한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시끌벅적한 소란은 차라리 고통일 뿐이다.

양날의 검

퇴직연금제도는 노동자의 노후 또는 퇴직이후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자본 측의 노동자의 해고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1) 국민연금급여의 노령연금 수급개시연령이 60세에서 장기적으로 65세까지 상향조정되는데 반해, 퇴직연금은 55세부터 수령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은 공적노후보장의 틈새를 유연한 사적제도로 보충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55세부터 60세(65세)까지의 소득보장에 대한 국가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도이다.

물론 조기노령연금을 선택할 수도 있고,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할 수도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퇴직금제도를 유지할 수도 있으며, 사내적립을 지속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에는 급여율의 축소와 세제상의 불이익 등 상대적 손실 감수가 전제된다.

왜 퇴직연금인가?

1961년 30인 이상 사업장에, 1989년부터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었던 ‘퇴직금제도’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있다. 아직은 퇴직연금과 퇴직금제도 중 선택이 가능하지만, 장기적으로 퇴직연금을 강제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퇴직금제도에서 퇴직연금제도로의 변환을 꾀하고 있는가?

노동자의 노후 보장과 사용주 부담의 실질적 감소를 퇴직연금 도입의 일차적 목표로 정부는 제시한다. 일시금 위주의 퇴직금이 노동자의 노후보장에 기여하기 보다는 퇴직 이후 단시간 동안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2) 또한 퇴직금충당금이 실질적으로 적립되지 않고 회계 상의 부채로 기록된 상태에서 지급사유가 발생할 때, 기업의 운영자금에서 마련하여 지급하는 것은 기업도산 등에 따른 퇴직금의 수급보장이라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기업주 전액부담의 현 제도의 부담률은 임금대비 8.33%지만, 장기근속자의 경우 누진율 적용으로 부담률이 급증하며, 더구나 퇴직금충당금의 미적립 문제는 장부상의 부채로 인한 주가 저평가의 문제를 가지며, 인력 구조조정의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감춰진 또는 공공연한 의도 1: 증시부양

그러나 노동자와 사용주, 양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이라는 정부의 포장 이면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 1998년 퇴직금제도 개선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기업연금’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되었는데, 1998년이 가지는 상징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업연금의 도입 이면에는 적립된 자금을 증권시장에 투입하여 증시를 부양하게 한다는 목적이 감춰져 있었고, 이를 언급한 재경부는 사실상 이와 같은 암내를 공공연하게 흘리고 다녔다.

DB형이든 DC형이든 퇴직연금제도는 퇴직금충당금의 사외적립을 원칙으로 하여, 기업에게 세제혜택을 지원한다. 최초 기업연금이 논의될 당시, 기업의 퇴직금충당금의 사외 적립률은 48% ~ 68% 정도로 추정되었고, 사내적립분과 사외적립분을 제외할 때 약 3조 가량이 신규자금이 주식시장에 투입되고, 이 둘을 포함할 때 약 20조원의 금액이 주식시장에 투입될 것으로 판단했다.

감춰진 또는 공공연한 의도 2: 다층구조 노후보장의 선결요건 구성

93년 1월부터 99년 4월까지 ‘퇴직금 전환금’이라는 이름으로, 퇴직적립금 중 일부를 국민연금가입자들의 보험료(9% 중 3%)로 지불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퇴직금제도는 약 35년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노동법 개악을 통해 임금채권우선변제 중 퇴직금부분을 ‘3년’에 국한한다고 명시하였고, 퇴직금의 누진적 성격이 사용자의 이해에 위반된다고 판단하여 ‘퇴직금중간정산제도’를 도입하는 등3) 퇴직금제도는 변화의 기로에 섰다.

그 변화는 퇴직금제도 자체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만, 변화하는 경제·노동시장에 조응하는 제도 체계를 구성하려는 의도는 확연하다. 98년 최초로 기업연금으로 퇴직금제도의 개선이 논의된 지, 7년이란 긴 기간을 거쳐 법제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제도 개선에 대한 실질적 합의가 무산된 이래 약 1년 만에 퇴직연금제도 도입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4)

연금개혁을 위시로 한 노후소득보장체계 재구축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세계은행은 한국의 노후보장정책에 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 50% 정도의 노동자들만이 퇴직금제도의 혜택을 받는 것과 일부 노동자의 경우 퇴직 후 소득이 퇴직 전 소득의 90%가량 되는 것은 형평성의 수준에서 문제가 있다. 둘째, 퇴직수당과 국민연금의 장기적 안정성을 고려한 자본측 부담률이 25%가량 치솟는 것은, 노동시장과 잠재성장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들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다층보장체계 구축을 내세우고, 자본의 총부담을 15%내로 제한할 것을 제시하였다.

정부의 퇴직금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의 이면에도 마찬가지로 노령화에 따른 시급한 정책과제의 하나로 제기되는 다층노후소득보장체계의 강화에 퇴직연금이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과 그 신념을 정책화하는 일관된 흐름이 존재한다. 공적소득보장의 축소와 사적노후소득보장의 지속적 확대는 일관되게 그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는데, 이미 보험업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개인연금, 금번 퇴직연금의 도입, 그리고 소득대체율 인하를 핵심으로 하는 국민연금개정은 다층 노후보장의 체계적 구성을 완료하는 형태이다.

다층노후소득보장체계: 흔들리는 공적보장의 위상

문제는 이와 같은 다층보장체계를 이유로 하여, 공적노후보장인 국민연금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국민연금 방송광고에서는 ‘국민연금은 더 이상 노후소득보장의 핵심이 아니라, 기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장기적으로 소득대체율의 인하 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소득재분배를 발생시키던 연금급여산식의 조정도 언젠가는 이루어질지 모를 일이다. 국민연금개정을 둘러싼 논란에서 한나라당은 이미 국민연금을 철저히 소득비례로 하여 소득대체율을 20%로 낮추고, 기초연금을 도입하자는 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사적연금시장의 확대를 통한 노후소득보장’을 노후설계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후보장이 상품이 되어간다.

인간의 기본적 삶의 조건들이 충족되는 방식은, 철저히 시장과 개인에게 맡겨졌다가,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던 탈상품화의 과정을 거쳐, 신자유주의의 매서운 공격 속에 다시 재상품화되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어떤 상품이 어떤 소비취향과 경제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가’하는 상품분석은 잡지나 신문의 광고성 기사의 한 면을 차지한다. 마찬가지로 ‘DB냐, DC냐’의 논란은 ‘투자·운용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다니고 있는 회사의 특징과, 이직이 잦느냐 등의 직업적 특성’에 따라 어떤 상품이 유리한가에 대한 기준 제시 수준으로 전환되어 신문·방송에 나타나고 있다.

주식시장을 위주로 한 금융시장의 활황과 침체에 따라, 투자성과가 결정되는 금융상품이 단기적 성과에 근거해 시장 출입이 가능한데 반해, 퇴직연금이라는 상품은 20~30년간의 장기적 전망을 고스란히 투자기관의 손에 맡긴 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DB 방식 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기업입장에서 장기적으로 부담의 감소는 DC 방식이며, 노조 동의라는 절차상의 과제가 남아있지만 현 단계에서 노조의 부동의로 인해 DC 방식으로 전환하는데 애로를 겪을 기업이 많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공적 노후보장 체계의 축소, 퇴직연금·개인연금의 사적 시장의 확대는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노후가 금융시장의 변동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화의 길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제 노동자들의 노후는 현실의 경제상황과 정확히 합치하게 된다.

이 상품시장의 유일한 승리는 퇴직금을 재원으로 하여 주식시장을 활성화하고, 그 실현차익이 노동자와 기업에게 돌아가는 장밋빛 환상을 내세우며, 상품을 구성하는 금융기업과 자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에게 투자실패의 책임은 없다. 화살은 자신들을 선택한(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의 폐해: 엔론사태가 주는 교훈

2002년 초, 천연가스 공급업체로 시작해 15년 만에 미국의 7대 기업으로 성장하였던, 에너지 기업 엔론사가 각종 부정과 비리에 얽히고설킨 상태로 파산한다. 이 기업의 퇴직연금이 자사주 위주로 운영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85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회계부정이 드러남으로써 1달러로 급락하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후소득의 기반을 순식간에 날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DC형 연금제도의 기반을 다졌다는 미국의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ERISA)와 일명 401(k) 퇴직연금으로 불리는 미국내국세법(IRC) 401조 k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RISA는 종업원간의 형평성, 수급권 등의 적격요건을 설정하여 이를 충족할 경우, 세제혜택을 지원하는 것으로 세제적격연금 도입의 시초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IRC 401조 k항은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기금을 투입할 때, 각종 세제혜택(소득세 이연, 소득공제)을 제공하며, 중도 해지 시 높은 소득세와 위약금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노후소득보장의 기능을 수행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기업은 근로자가 401k에 적립하는 금액의 일부를 지원(매칭)할 수 있게 하고, 이에 대한 세제 혜택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 매칭의 조건으로 자사주 매입을 강제했다는 것에 있는데, 8,90년대 최고의 직장으로 평가받던 엔론의 직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직원이면서, 동시에 회사의 투자가로서 역할을 수행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파산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가 주는 교훈은 확연하다. 퇴직연금이 도입되고, 이를 관리할 위탁회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한 거래가 이뤄진다면 퇴직연금운용에 따른 실질적 피해를 고스란히 노동자가 감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모회사가 하나의 금융자회사를 만들고, 그 금융자회사가 퇴직연금을 관리하면서 모회사 주식을 중심으로 주식운용을 한다면, 언제든 국내에서도 제2의 엔론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1)거시적으로 보자면, 퇴직연금의 도입을 통한 주식수요기반의 확충 -> 주가변동성 감소 -> 기업가치에 기초한 투자관행 정착 -> 기업지배구조 개혁 -> 주주가치 극대화 노력(감량경영, 대량해고 등) -> 노동자의 궁극적 이해 감소의 과정을 거칠 것으로 판단된다.위로

2)일반적으로 1년에 1개월분의 퇴직금이 적립되는 것을 고려하고,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년수를 고려하면, 퇴직금으로 약 6개월의 생활이 가능하다.위로

3)표면적인 이유는 지급불능사유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다.위로

4)98년부터 퇴직금제도 개선이 노사정위원회 의제로 선정되고, 01년 7월 노사정위원회에서 퇴직금제도 개혁논의가 진행되었지만, 03년 3월 적용확대 등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노사정위원회는 완전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정부안은 제출과 입법예고를 거쳐 04년 11월 8일 국회에 상정되었고, 같은 해 12월 29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하고,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은 05년 1월 27일 공표되었다.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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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식 님은 한노정연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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