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 생명윤리 아닌 인간의 고통에 주목해야

[황우석사태진단](1) - 황우석 사태와 생명윤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 2005년12월14일 9시44분

[황우석사태진단]을 시작하며

황우석 교수가 논문 재검증 요구를 받아들이고, 서울대가 조사위원회 구성에 들어가면서 '황우석 사태'는 논문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었다.

'황우석 사태'는 섀튼 교수의 결별과 1차 PD수첩 방영 시기, 11월 24일 황우석 교수의 사과 기자회견 시기, 12월 4일 YTN의 연구원 인터뷰 방영 시기. 12월 10일 프레시안의 녹취록 공개 시기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수많은 사회적 이슈와 갈등을 불렀다.

'황우석 사태'는 국익 이데올로기, 의료산업, 여성인권, 기초과학 지원의 형평성, 생명윤리, 과학 연구의 민주적 감시 통제, 연구 성과의 사회적 환원, 진실 보도를 위한 언론의 역할과 취재윤리, 미디어와 대중 심리 문제 등의 이슈로 발전, 모든 사회구성원의 이목을 집중시켜왔다.

지금도 황우석 사태는 진행형이다. 논문 검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또 한번의 소용돌이가 예고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이슈로 불거진 쟁점 문제들이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민중언론 참세상은 지난 좌담에 이어 진보적 오피니언의 도움을 받아 주요 쟁점을 하나씩 다루고자 한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번 사태로 불거진 이상 과잉 열기를 식히고 이성과 상식의 잣대로 불거진 모든 문제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편집자주]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있어 생명윤리 논란은 배아를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가 라는 종교적 윤리의 측면에서부터 연구원 난자 기증과 난자 매매 문제에 걸쳐 여러 쟁점이 형성되었다. 특히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생명윤리는 생명의 기점과 복제인간의 문제를 두고 제기된다. 난자에 체세포핵을 이식해 만든 배아를 잠재적 인간생명체로 볼 것인가 여부의 문제이다.

첫 글로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의 '황우석 사태와 생명윤리'를 소개한다.

최형묵 목사는 '생명의 연속성의 논거'와 '복제인간'의 지점을 들어 위 논쟁의 쟁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로부터 "생명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대의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복잡한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선택해야 할 윤리적 판단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이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윤리의 논의가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인데, "생명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와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빚어질 여러 문제" 등이 화급을 다투는 중대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최형묵 목사는 "놀랍게도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는다"며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생명의 신성함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고, 따라서 현재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윤리 논의는 명백히 한계를 갖는다는 설명이다.

최형묵 목사는 추상적 생명윤리 논란을 접고 현실에서의 생명의 고통, 인간의 고통 현상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고통을 야기하는 조건을 헤아리고, 특정 조건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우선 순위와 궁극적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를 탐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고통 중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과제가 근원적인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판다하는 문제에 비해 결코 소홀히 다뤄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추상적 가치 판단이 아니라 현실 '생명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최형묵 목사가 주장하는 생명윤리의 핵심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 난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경제적 빈곤으로 치료혜택을 누릴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누군가의 질병치료를 위해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그야말로 '숭고한' 자발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경제적 빈곤으로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등등..."

최형묵 목사는 이 생명 고통은 "추상적 생명윤리나 열광적 국익논리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 진단을 내놓는다. 이하 기고글 전문이다. - [편집자]


윤리적 문제제기의 정당성

새튼 교수의 결별 선언과 문화방송의 PD수첩 방송 이후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관련 보도가 한 달이 넘도록 거의 매일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연구윤리 문제가 발단이었는데, 이제는 언론의 취재윤리 문제에다가 연구 자체의 진위 공방까지 덧붙여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해 보인다. 그 바람에 애초 제기되었던 윤리 문제는 부차화되어 버리고 미궁의 진실게임에 돌입해버린 듯한 상황이다.

방송사의 보도로 밝혀진 윤리적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구원의 난자가 제공되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공된 난자들 가운데 일부가 사실상 매매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윤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 윤리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헬싱키 선언> 등을 포함한 국제적 윤리 규준은 인체실험에서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중요한 요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연구 종사자의 경우 자발적 동의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연구자가 피험자가 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는 것이 관례다. 연구의 최종 책임자가 사전에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양해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것이 윤리적 흠결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연구에 사용된 난자 일부가 매매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사실 더욱 심각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난자매매를 금지하고 있는 생명윤리법이 시행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고, 또한 절차상 난자 제공자의 자발적 동의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제공 동기가 경제적 빈곤이 분명하다면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사회에 미칠 파장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문제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와 의료체계 안에서 가난한 여성의 몸의 착취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장기시장과 난자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암암리에 난자매매가 횡행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례로서 심각성을 띠고 있다.

방송사의 보도가 바로 그와 같은 윤리적 문제제기를 하려 했다면 그것은 정당하고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 이상한 공방전으로 흘러가 그 문제제기가 퇴색되어버리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지만, 그와 같은 윤리적 이의제기는 국익을 내세워 나무랄 일이 결코 아니다. 보편적인 윤리 규준은 국익을 뛰어넘어 인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준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윤리의 주요 쟁점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신기원을 연 연구성과로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도 사실 종교계와 시민사회계에서는 끊임없이 윤리적 이의제기를 해 왔다. 하지만 그 윤리적 이의제기는 세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기념비적인 연구에 흠집을 내려는 딴지걸기 정도로 치부되어 온 탓이다.

그러나 한편 그 문제제기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접근방식 자체가 갈등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탓도 있다. 모든 윤리적 논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는 현실의 복잡한 상황에 비해 너무나 추상적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기본 전제로 하는 기독교계의 생명윤리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중요한 쟁점으로 삼고 있다. 하나는 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이다.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란이 생명윤리의 핵심 쟁점으로 제기된 것은 난자에 체세포핵을 이식해 만든 배아가 잠재적 인간생명체인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생명윤리적 접근은 생명의 연속성을 근거로 그 배아가 잠재적 생명체라고 주장함으로써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생명을 유기하거나 심지어 사실상 살인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복제인간의 탄생에 관한 우려는, 현재의 체세포이식 기술로는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은 없다고 하지만 복제양 돌리와 복제개 스너피가 동일한 원리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생명윤리적 접근은 복제인간이 탄생할 경우 인간의 정체성이 어찌될 것인가 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명존엄을 기본 전제로 하는 윤리적 접근은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아 논란의 소지가 있고 따라서 곧바로 다른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 예컨대 생명의 연속성 논거로 볼 것 같으면 정자나 난자라고 해서 잠재적 생명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그 논거로 자명하게 수정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생명현상은 일련의 연속되는 과정일 뿐이다. 또한 복제인간은 흔히 우려하는 것처럼 원본인간의 부속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란성 쌍둥이들이 유전자가 동일하다 해서 동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인격체들인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복제인간의 탄생 자체가 인간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사실상 그 유용성 자체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복제인간이 어떤 인간의 부속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라면 그와 같은 인간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유전자치환 인간이 그 유용성이 높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파급 효과가 클 수도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반론은 생명윤리가 자명하게 전제하는 판단근거가 그렇게 자명하지 않기에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안에서 그 타당성을 검토 받아야 할 소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대의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복잡한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선택해야 할 윤리적 판단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와 같은 생명윤리 논의들은 대개 제발 판도라 상자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관점에서 제기되는 우려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판도라 상자가 열린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고 있다.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윤리의 논의는 그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생명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미 판도라 상자가 열린 상황에서 더 화급을 다투는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와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빚어질 여러 문제 등은 사실 지금 당면한 문제들로서 화급을 다투고 있다. 놀랍게도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생명의 신성함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라는 점을 깊이 다루고 있지 못한 것이 현재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윤리 논의의 한계다.

생명존엄의 기치(旗幟) 뒤에 가려진 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가 추상적인 생명존엄의 가치만을 내세울 뿐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조심스러운 진단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면에 권력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기독교에 악재이며 동시에 호재이다. 기존의 신학적 관념을 뒤흔들 만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악재이지만, 정반대로 바로 그 때문에 생명존엄의 기치를 한껏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재이다.

일반 신자들이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선언적인 명제로 갈등의 상황을 종식시키려는 태도는 그 선언 주체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것일 뿐 실제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악재로 받아들인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상황, 그리고 일반 신자들의 갈등의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이미 예정된 결론만을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사실상 진전시키기 어렵게 하는 것은 다른 저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 태도는 사실상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호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윤리 도덕적 정당성을 자랑하는 호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본질 문제에 집착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갈등의 상황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 기독교계의 태도 배후에는 일종의 권력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물론 고의일 수도, 아니면 미필적 고의성을 띤 것일 수도 있다.

고통의 현상에 대한 주목

현실감을 결여한 추상적 생명윤리의 한계를 벗어나고 동시에 숨겨진 저의를 갖고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고통, 구체적으로 인간의 고통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조건 아래서 경험된다.

따라서 그 고통을 야기하는 조건을 헤아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방안을 찾아야 한다. 또한 특정한 조건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동할 때 어떤 경우를 우선 순위로 선택해야 할 것이며 궁극적인 해결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탐색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당장 난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경제적 빈곤으로 치료혜택을 누릴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누군가의 질병치료를 위해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그야말로 '숭고한' 자발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경제적 빈곤으로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등등, 이들의 고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볍고 어느 것이 더 무겁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이를 헤아리는 것은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과제이다. 이것은 근원적인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문제에 비해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는 문제이며 오히려 시급한 과제이다.

추상적 생명윤리나 열광적 국익논리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 과제를 두고 지금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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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최형묵 님은 천안살림교회 목사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