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피맛골 방문기

최인기  / 2004년11월09일 10시45분

전에 신세를 지던 선배를 만났다. 오늘 내가 한턱 거나하게 쏘겠다고, 술 한잔하자고 불러냈다.가을 해가 떨어지면 종로 뒷골목 곳곳에 있는 포장마차는 환한 불빛으로 휩싸인다.

3가 탑골 공원옆 ‘동굴 다방’을 지나 몇 걸음 더 지나면 지금은 없어진 파고다 극장 자리 앞 지하에 이발소가 있다. '이레 이용원', 인상 좋은 중국 교포 아주머니가 후덕하게 머리도 감겨 주고, 면도도 해주며, 반겨 주는 곳이다. 때마침 할 일없는 동네 노인들이 이발소에 모여 던지는 농짓거리에 눈웃음을 쳐주며 싫은 표정 없이 한마디 한마디 말 댓구 해준다. 그럴 때마다 중국 교포아주머니의 억양이 다들 우스워 죽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목에 흰 천을 두르고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앉았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한가한 날은 면도도 해주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나서 면도사가 어깨도 몇 차례 탁 탁 두드려 주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가신다. 가격은 얼마냐고? 놀라지 마시라 3천 5백원이다. 그것도 주인이 물가가 올라서 요금이 올랐다며 미안해하는 가격이다.

문을 나서니 가을 바람이 포르스름 깎인 구렛나루 귀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제법 춥다. 출출한 배를 채우려고 옆 골목으로 몇 발자국 옮겼다. 실비 식당들이 탑골공원 담장 옆으로 종로 재활용센타 앞까지 즐비하다. '오복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된장국 2천 원, 시래기국 1천 5백 원. 오늘은 내가 한 턱 거나하게 쏘기로 했다. 2천 5백 원 짜리 뼈다귀가 수북히 쌓여 들어오는 해장국을 시켰다. 시큼한 깍두기 국물을 넣고 밥 한 공기 말아 훌훌 털어 넣으니 아- 그 포만감이란...

청진동 쪽에서 장사를 하는 잘 아는 노점상에게 찾아가 술 한잔 걸치기로 했다. 낙원상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인사동 골목을 가로질러 피맛골로 향했다. 꽁치, 삼겹살 굽는 냄새가 입구부터 진동하는 피맛골을 떠올리며 잰걸음으로 들어서는데... 낯설다. 골목길 곳곳은 파헤쳐져 있고 철거를 규탄하는 대자보와 낙서들이 즐비하다.

그곳에 새롭게 건설 바람이 일고 있다. ‘피맛골’이라 불리는 청진동에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대자보 내용을 요약하니 다음과 같다. '1996년부터 현대자동차 측에서 1,926억 원을 명의신탁하여 2001년 재개발 허가를 냈고, 그리고 2003년 1차 철거를 시작으로 세입자들을 내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민들의 뒷골목 문화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 나랏님이 행차를 하실 때 아랫것들이 큰 길을 피해 자리를 비켜주는 곳이라 해서 ‘피맛골’이었다는데, 이제는 새로운 건설자본의 이윤 앞에 그 뒷길마저 빼앗기며 무참히 무릎이 꺾이고 있었다.

이미 작년부터 청계천에서 불기 시작했던 강북지역의 재개발 바람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주택뿐만 아니라 길거리 노점상까지, 살을 붙이며 생계를 유지해 살던 이들을 차츰 차츰 또다시 어디론가 내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매일 매일 종로구청 앞에는 철거민들이 집회를 하고 있고, 11월 4일에는 이곳 청진동의 철거대책위 사무실로 쓰이던 만나회관 식당이 침탈됐고, 용역깡패의 보호 속에 집달관들이 들이닥쳐 식당 안 집기를 모두 철거하였고, 관계기관에서 고용한 용역 경비 대금 7억 5천만 원을 청진동 철거민 6명에게 덮어씌운 상태라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가지 더! 이곳 피맛골은 문화재 터나 다름없다. 그 위에 공사를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기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재관리 직원 한 사람 정도만 파견하여 구색만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는 전쟁과도 같이 수없이 반복되는 집회를 마치고 매케한 최루가스를 털어내며 피맛골로, 혹은 근처의 포장마차로 기어들어가 오늘을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했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그렇게 마셔댔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라도 내리면 우산을 털고 포장마차 자리를 꿰어차고 앉아 악을 쓰며 하루하루의 쓰디쓴 일상을 달랬다. 어쩌면 내일 당장 무너지고 허물어져 내릴지 모르는 삶의 불안을 오뎅 국물과 한 잔의 소주로 달래고 일으켜 세웠는 지도 모른다.

오랜 선배를 불러내서 술 한잔 기울이며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을 얘기하려는 계획을 접고 속절없이 우리는 또다시 건너편 관철동 거리로 자리를 총총 옮겼다. 거기도 역시 젊음의 거리 앞 공사로 인해 쫓겨날 노점상들이 천막을 치고 벌써 보름째 차가운 거리에 앉아 노숙 농성 중이다.

이리 저리 가는 곳마다 그렇다. 비록 오늘이 남루해도 내일 또 하나의 희망을 건지기 위해 꾸역꾸역 몰려들던 종로통 뒷골목의 네온싸인이 농성하는 이들의 머리위로 오래 오래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광고] 요즘 동묘역(6호선) 앞에서 떡볶기 장사 시작했어요. 물론 단체 일도 계속 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헤~ 다들 수고하시고 장사가 안 돼서 그러니 놀러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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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복이장사를 시작했다니 축하드립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근데 개업을 했으면 개업식을 해야되고 저도 연락을 해줘야죠...
무척 섭섭하군요
불시에 한번 들르겠습니다
부~자 되세여
접니다
2004.11.09 13:08
야! 광고까지 해주고 고맙네요...

그런데 6호선 동묘 역 근처거든요 우리 사무실에서 가까워서 오후 3시부터 장사 하는데 다행히 동업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십니다.
떡볶기 하고 순대하고 오뎅입니다. 꼬마 김밥도 있고 아참! 찐 계란도 있구나 벌써 손수레 한번 빼앗겼답니다.
내 손수레 끌고 가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종로 구청과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세상 기사 쓰길 잘했네..
최인기
2004.11.09 19:33
미디어참세상에서 칼럼 보고 왔다고 하면 10% 깎아주는 거 어때요?
유영주
2004.11.09 19:38
동지들 오시면 제가 따끈한 오뎅국물 무료로 막 드리겠습니다
외상도 가능하고 10% 할인도 합니다. 아참 화환은 안받습니다...
단 식사는 하지말고 오세요 ㅋㅋㅋ
최인기
2004.11.10 09:11
헷.. 순대 먹으러 가야지~~~
지후
2004.11.14 00:49

덧붙임

최인기 님은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