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금지 당한 자유 : 대마초 합법화를 요구한다

담배 부흥과 대마초 쇄락은 자본주의의 속성을 관통하는 역사 그 자체
대마초 합법화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적 패러다임의 교체

완군 ssamwan@jinbo.net / 2004년12월22일 11시38분

‘마약’ 혹은 ‘환각’이라는 단어아래 개인의 욕망과 감각을 묶어두려는 국가주의의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단 한번도 ‘마약’(혹은 환각)이란 단어의 제자리 찾기를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제복으로 상징되는 획일적 교육 체제 안에서 ‘환각(혹은 마약)’은 본드 부는(?) 비행 청소년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단어였으며, 까라면 까는 군대의 질서가 사회 곳곳에서 구현하는 동안 ‘마약(혹은 환각)’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결국, ‘마약(혹은 환각)’은 개인의 욕망을 통제해야 유지 가능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속에서 ‘건전한 사회(!)’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중차대한 범죄적 행위가 되었다. 물론 ‘마약(혹은 환각)’이 왜 나쁜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며 정확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영화배우 김부선 씨의 위헌법률신청 등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마초 합법화’ 논쟁의 핵심은 그래서 어느 연예인의 권리 찾기를 넘어 결국 사회적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사회의 패러다임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대마초 규제의 역사는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와 일치한다. 대마초의 유일한 해악은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대책없는 게으름’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가 두눈 부릅뜨고 저주해왔던 자본주의의 오랜 적이었다. 건강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대마초에게 가했던 폭력의 올가미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공고해졌으며 교묘해졌다. 자본주의와 대마초의 화해할 수 없는 이 저주의 관계는 대마초와 담배의 지위를 보면 보다 확고해진다.

담배의 부흥과 대마초의 쇄락은 바로 자본주의의 속성을 관통하는 역사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부흥의 동력은 노동자에게 끊임없이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것이었고 ‘금욕주의’의 깃발아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유력한 힘이었다.

노동력 착취를 속성으로 한 자본주의의 축적과 발달은, 결국 노동 이외의 모든 가치들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금욕주의’는 자본주의가 강제한 오랜 전통이며 자본주의 발달의 근원적 힘이었다. 담배는 용납되고 대마초는 배척당한 극적 대비는 정확히 이 자리에 위치한다. 담배가 긴 노동의 중간을 메우는 짧은 위로의 연기었다면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근본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담배가 노동사회의 착취를 공공히하는 기재였다면 대마초는 노동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자본주의

그러나 여전히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마약을 법률로 관리한다. 그러나 우리 보다 앞서 사회적 갈등을 겪은 대부분의 나라들은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어디까지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것인가’를 둘러싼 값비싼 경험들을 치르고 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약’을 통제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틀어막고 처벌하는 일이 매우 부당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일찌기 마약 정책의 근간을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정책’으로 설정하고 ‘사회 복지와 치료의 관점’으로 마약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가장 효과적이고 균형있는 마약 관리에 성공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매우 친절한 동맹 미국만은 여기서 예외이다. 미국은 현재 유일하게 강력한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거의 유일하게 실패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마약’을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훨씬 이전부터 ‘마약’은 인류의 오랜 역사적 경험이면서 문화적 체험이었고, 민족적 전통이면서 종교적 황홀함이었으며 동시에 의학적 성취였다. ‘마약’은 국가의 통제가 필요치 않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행위이며 공동체의 자율적 질서에 의해 오랫동안 별탈없이 관리되어온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국가 자본의 필요에 의한 위계와 질서 그리고 통제와 훈육의 관점에서 ‘마약’을 바라보면서 법으로 금지하기 시작한 행위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보자면 매우 최근의 일이며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이다.

노동사회를 넘어 문화사회로

앙드레 고르에 의하면 노동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창안된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의 형태 역시 만들어진 것이지 본래 노동의 모습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며, 따라서 지금의 노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생산적 활동의 정형이라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삶을 위한 노동이 아닌 축적을 위한 혹은 임금을 위한 노동을 강요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동윤리는 이러한 맥락속에서 철저히 자본가와 국가의 요구로 구성된 왜곡된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지배와 노동사회를 넘어선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미있을 만큼의 대대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급선언이며 노동과 축적으로 단순화된 계급적 관계와 모순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선언이다. 대마초의 빛나는 자리는 여기가 될 것이다.

대마초 합법화 주장은 다른 마약에 비해 대마초가 과한 규제를 받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자고 주장이 아니며, 역사적 경험속에서 대마초가 진보와 변혁, 혁명의 언저리를 태워왔으니 이를 복원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마초 합법화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적 패러다임의 교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노동사회에서 훈육과 통제를 전제로 선택이 아닌 개인의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포괄적 자기결정권을 회복하고 아주 타당한 자유들을 실현해 나가자는 것이다.

진짜 ‘자유’를 위하여

여전히 이 땅은 수없이 많은 자유들은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오랜 독재의 경험과 압축적 근대화의 기억은 ‘자유’라는 단어 자체에 왜곡된 인식을 동반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자유’가 정치적 입장을 밝힘으로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통해 개인을 둘러싼 ‘문화’를 교체할 때비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한 ‘자유’가 누구를 위한 이념이 아니라 계급적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모든 시대에서 존재해 왔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요구라면, 따라서 ‘자유’가 개인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가로지르는 개념이자 환경 그 자체라면, 우리는 보다 근본적이고 높은 수준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대마초 합법화 투쟁은 일반 민주주의 이상의, 보다 급진적이고 자기 실천적인 자유를 요구하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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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완군 님은 문화연대 정책실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