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동에서 살해 당한 <그때그사람> 아직 서울지법에 있다

자율성, 전문성 보장 대신 법으로 재단하겠다는 것은 파쇼적 발상

완군  / 2005년02월03일 16시49분

아직도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에 침을 튀기며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 참 서글프다. 새삼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당연한 권리를 설명하는 당위적 언어로 ‘개인의 인격권’과 ‘망자의 명예’를 말하는 방정맞은 주둥이를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상성의 단계’에 진입한 이후 정치적 권리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새로운 권리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문화적 권리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는 낮은 단계를 넘어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등 삶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보다 높은 단계를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그사람들>에 대한 법원의 삭제 상영 판결은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통제 욕망’의 표출이다.(안타깝게도 법원 판결 이후 ‘표현의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과 ‘박정희’라는 실제 인물이 뒤섞이며 논의의 지형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개별 영화에 대한 지지의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의 보편 가치이자 아주 타당한 문화적 권리이다.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보편 가치와 시민들의 아주 타당한 권리들을 얼마나 경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어둠의 70년대’, 특히나 79년 10월을 뜨겁게 살지 못한 사람에게 집단적 체험에 기대서는 ‘그 시절’의 이야기는 함부로 껴들기 어려운 소재이다. <그때그사람들>은 철저히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약간 오래되고 훨씬 정치적인 <살인의 추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살인의 추억>이 80년대의 밑바닥 삶들에게 심심치 않은 위로를 던졌다면, <그때그사람들>은 70년대의 막바지를 붉게 물들였던(!) 최고 권력자의 실체와 값어치를 폭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키니 수영복의 상의를 벗어던지고 풀장으로 몸을 던지는 <그때그사람들>의 첫 장면은 ‘풍요와 번영’의 80년대를 미리 맛보고 있던 최상위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희롱이자 야유이다.

국가와 각하가 절대시되던 그 시절이건만, <그때그사람들>의 어느 장면에도 그 만큼 막강한 권위는 담겨 있지 않다. 민족과 국가를 짓밟았던 제국의 언어와 노래에 매혹당한 권력자가 있으며, ‘각하’의 권위를 칭송하던 어머니는 젊은 남자에게 껌세례를 받는다. 자리를 지키라는 과장의 명령에 운짱은 쌍소리를 삼키고, 맥주를 마시라는 비서실장의 권유에 여대생은 싱겁다고 응수한다.

합참의장은 육군본부의 정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흰 빤스 위로 몸뚱이를 드러내고, 각하가 죽었다는 엄중한 보고가 이뤄지는 동안 혈압을 재는 각료들의 모습은 한가롭고 무료해 보인다. 이 영화가 유일하게 그 시절의 권위를 인정하는 순간은 야전침대위에 드러누운 ‘각하’의 아랫도리를 가리는 ‘장군’의 군모를 비출 때 뿐이다. 그렇다. ‘그 시절’은 ‘각하’의 시신과 ‘장군’의 군모, 그리고 거기에 바치는 ‘일동경례’ 뒤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때그사람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영화의 내용이 아니다. 법원이 판결문 형태를 빌린 영화 감상문을 보태면서 <그때그사람들>은 정말 중요해졌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막개발적 용어로 정리되는 박정희의 허구적 개발 신화는 세기를 넘겼지만 좀비처럼 살아남아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아니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박정희의 정치적 공과를 따지는 허무한 일은 집워치우자, 사회 곳곳에 만연한 고질적인 조급함과 결과 중심적 사고,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와 고착화 되어버린 접대 문화 등 박정희 신화의 악덕은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며, 아주 미세한 일상까지 침투해서 우리의 사고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금방 잊고 새롭게 해석해 버리는 것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특징인 것 처럼, 우리는 일상의 황폐함을 쉽게 잊은채 박정희 신화의 악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라도 박정희를 칭송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당신의 편에서 싸우겠다.” 볼테르의 말처럼 표현의 자유는 예외없이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995년 국제법, 국가안보 및 인권의 전문가 그룹에 의해 채택된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의 원칙>은 각국의 표현의 자유 관련 법조항과 판결을 토대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첫 번째 원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표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 국가의 상징, 국민, 정부, 정부기관 내지 공무원 등에 대한 비판 또는 모욕적 표현까지도 체제를 전복할 만한 폭력을 선동할 명백한 의도가 없다면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헌법 제37조는 ‘모든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경시되지 아니하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제21조와 22조는 새.삼.스.럽.게.도. 언론․출판․집회․결사․학문․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존중해야 하는 헌법의 정신은 ‘우리는 되지만 (우매한) 일반인들은 영화를 보고 현실과 허구를 혼동 할 수 있다’는 판사의 꼴 사나운 잘난 척이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경시하지 않는 것이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현재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행동의 의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창작물은 완전한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며 창작물의 유통 과정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끊임없는 소통과정일 뿐이다. <그때그사람들>에 대한 이번 판결은 우리사회가 여전히 폭력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사회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참혹한 결과이며, 시민 스스로의 역량을 법원이 재단해버린 심각한 문화권 침해 사건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창작물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으며(개정 저작권법은 그래서 완전 코미디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판결한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창작하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보장하고 그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또한 사회 각 부문은 나름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모든 부문과 활동을 법으로 재단하겠다는 것은 굉장히 파쇼적인 발상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경우가 아닌 한, 법은 언제나 가장 늦게 최소한의 개입만 해야 할 것이다. 사법체계는 모든 범죄자를 잡아들이게 되었지만, 수사를 함에 있어 경찰과 검찰은 자율적 판단 기능을 갖는다. 이는 문화예술과 기타 분야에도 마찬가지어야 한다. 모든 가치가 법률적 판단에 종속되는 사회는 결코 활력을 가질 수 없다.

궁정동에서 살해 당한 <그때그사람>은 아직 서울지법에 있다. 20년 후 누군가, 한 편의 영화를 표현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숨막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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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군은 문화연대 정책실 활동가이다.